시간이 늘어난 일요일
아침의 달리기와 맛있었던 저녁 덕분이었는지, 나는 오늘 늦잠을 잤다. 눈을 떠 보니 열 한 시가 넘어있었다. 열 한 시라니, 깜짝 놀라서 이불을 차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는데 생각해보니 사실은 열 시였다. 일광시간절약제가 밤 사이에 끝나서 하루가 한 시간 늘어난 것처럼 느껴지는 오늘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 늦잠을 잘 수 없었다. 단지의 집집마다 다니면서 시계를 맞춰줘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2년 전, 막 이사를 왔을때였다. 어디를 가도 난 모임 같은데에는 절대 얼굴을 안 비추는 인간인데, 처음 막 이사도 왔겠다, 명함은 몇 천장을 받아 놓았어도 돌릴데도 없겠다… 해서 입주자 모임(=반상회겠지 결국)에 얼굴을 내밀고 명함이나 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 건축사 면허를 따고 난 다음에 부업으로 이웃의 이런저런 건축관련 일들을 거들어주고 푼돈을 챙겼다는 얘기에 솔깃해서, 면허를 따려면 곰이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될 때까지만큼 일해야 되었지만 미리미리 기반을 닦아놓자는 계산도 한 몫 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반짝반짝했던 오븐으로 쿠키를 잔뜩 구워가지고서는 입주자 모임에 얼굴을 비췄던 것이다. 명함 한 뭉치와 함께. 입주자 모임은 단지 근처 어느 작은 교회에서 열렸는데, 애초에 상정된 안건 같은데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계속 딴 생각을 해가면서 모든 절차가 다 끝나고 입주자 소개라도 하는 순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루한 순간들이 얼추 다 지나갔다고 생각될 무렵, 입주자 대표들 가운데 한 사람이 건의 사항을 받겠다고 하자 나이 지긋한 한국인 아주머니 한 분이 손을 들고서는 일 년에 두 번씩 시간이 바뀔때마다 집에 널린 시계들 맞추기가 보통 일이 아닌데, 입주자들 가운데 그 일을 전담할 사람을 하나 뽑자고 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대체 저게 무슨 헛소리냐, 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지만 생각해보니 시계가 거의 없는 나에게도 정말 그건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었다. 일단 내 집에는 벽에 못을 박고 걸어야만 되는 벽시계 종류가 하나도 없지만 서너개의 탁상시계가 있고, 대여섯개의 손목 시계 가운데 늘 차고 다니던 것들 두어개가 있었고,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주시는 밥통의 시계도 무시할 수 없었다. 더구나 냉장고와 차에도 시계가 있었고, 미국의 휴대전화는 그때까지만 해도 시간이 네크웤에 맞춰 저절로 맞춰지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그것도 바꿔줘야만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계들을 맞추고 나면 각 층에 하나씩 달린 냉난방 통제기의 시간을 맞춰야만 했다. 나 혼자 사는, 그리고 장식용 시계라고는 전혀 없는 집에서조차 적어도 열 개는 족히 될 시계들을 맞춰야 되는 판국이니 가족이 있는 사람들에겐 정말 큰 일이 아니겠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그 시계를 맞춰주는 전담요원(?)은 결국 내가 되고 말았다. 가족 없는 사람 손 들어보라는데 거짓말이라도 애가 둘이예요, 따위의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기 뭐한, 일년에 두 번 돌아오는 행사에 대한 책임을 혼자 어깨에 짋어지고 살게 되었다, 적어도 이 단지에서 살게 되는 동안에는.
그래도 세상에 공짜라는 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시계를 맞춰주는 대가로 5불씩을 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5불에 50가구가 넘는 단지니까 하루 일하고 250불은 벌 수 있다니 누군가는 짭짤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일단 시계들이 집안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집에서 10분 안에 일을 끝내기란 불가능했다. 게다가 벽시계가 많은 집들에서는 의자나, 최악의 경우에는 사다리까지도 필요했기 때문에 시간이 더더욱 많이 걸렸다. 정말 최악의 경우는 몇 대째 물려받아서 모시고 있다는 괘종시계 따위를 손대야 할 때인데, 상식이나 직감으로만은 시간을 맞출 수 없는 경우에 종종 처하게 되고, 그런 경우 잘못 시계를 건드렸다가는 덤태기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째로 시계를 맞춰주었던 2007년의 봄에는 받은 돈을 다 날리기도 했었다. 분명히 내가 손대기도 수천년은 전에 죽어버린 괘종시계를 거실 한 가운데에 모셔놓고서는 내가 손대서 망가졌다고 우기는 바람에.
어쨌거나 이 일도 이젠 네다섯번을 하고 나니 제법 요령이 붙어서, 이젠 일주일 전에 집집마다 알리는 쪽지를 돌려서는 벽시계까지는 떼지 않아도 좋으니까 손목시계나 탁상시계만은 한데 모아놓고 기다려주기를 부탁한다. 휴대전화도 시간을 맞춰줘야 되는데, 그럴 경우엔 내가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않도록 딱 시간을 맞추는 모드로 전환해놓고 기다려줄 것을 미리 알려준다. 단지에는 한국사람들을 포함한 동양인들이 많이 사는 편이라, 생각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집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되니까… 신발 벗고 신는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린다.
어쨌든 오늘은 열 시에 일어나서, 모르는 사람들의 집에 얼굴을 들이밀어야 하니까 평소보다 조금 더 깨끗하게 씻고 준비하느라 열 한 시에야 집을 나서서 다 돌고 나니 저녁 여섯 시, 바뀐 시간으로 해가 질 무렵이었다. 일 년에 한 두 번 볼까말까 하기 때문에 어차피 잘 기억도 하지 못하지만, 단지에 사는 ‘이웃’ 들을 보는 것도 이때가 전부이다. 아침에 일찍 나가고 해가 지고 난 뒤에 집에 돌아와서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으면 대체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알 수가 없다. 바로 옆집만 해도 이웃이 된지가 3년째인데도 그들은 내 이름을 모르고, 나는 내 집으로 잘못 배달된 편지 몇 통 때문에 Smith라는 성만 기억하고 있을 정도니까. 생각해보니 그런 내가 집집마다 들락거리면서 시계를 맞춰준다는 것도 참 웃기는 일이다. 어차피 아무하고도 왕래를 안 하는데… 그래서 새로 이사온 집들은 미리 통지를 받았어도 내가 초인종을 울리면 청소 용역업체의 임시직원인줄 알고 막 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때는 아무 말도 안 하다가 나가면서 ‘나 저기 세 번째 집에 사는 이웃인데 같은 단지 사는 이웃집의 일을 도와줘서 기쁘다’ 라고 한마디 툭 던지면 다들 당황을… 뭐 영어도 못 하는 줄 알았던 걸까?
웃겼던 건 집에 돌아와보니 시계들은 전부 일곱시를 가리키고 있었다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 시계를 맞춰주기 전에 내 시계들부터 맞춰놓고 나갔는데, 어제도 저녁 먹고 그냥 소파에 쓰러져 자느라 시계엔 손을 대지 못했다. 그리하여 부랴부랴 내 집의 시계들을 다 맞추고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달리기를 하려고 나가려는데 집 앞 잔디밭에 여름이 앉아있는 걸 보았다. 다른 동네에서는 벌써 한 달쯤은 전에 떠났다고 들었건만, 이 동네는 워낙 남쪽이다보니 여태까지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광시간절약제가 끝나고 난 다음까지도 머무를 명분은 없으니, 그도 이제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같으면 잔디와 같은 색깔이라 그냥 잔디를 깔고 앉았나보다, 라고 생각할만한 돗자리를 깔고 앉아 가는 슬슬 저물어 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지난주에 깎은 잔디는 벌써 반쯤 죽은 색깔이었고, 따라서 그의 녹색 돗자리는 돗자리라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평소라면 생동감있게 느껴졌을 법한 녹색은 무거운 느낌이었다. 지난 달 중순이었나, 날씨가 며칠 굉장히 더웠을 때만해도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였던 그는 아이처럼 쪼그라들어 있었다. 나는 달리기를 할 채비를 마치고 신발까지 신고 있던 상태였지만, 나가다가 그와 눈이 마주칠 것 같아서 블라인드를 위로 올려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만든 창가에 서서 그가 자리를 뜰 때까지 기다렸다. 곧,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았는데도 그는 무거운 느낌의 녹색 돗자리를 둘둘 말아 왼쪽 옆구리에 끼고서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긴 그림자가 꼬리까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창가에 선채로 바라보고 있었다. 길고 길었던 계절은 그렇게 저물었다.
# by bluexmas | 2008/11/03 14:00 | — | 트랙백 | 덧글(8)
저도 오늘 한시간 벌었다 생각하고 늦잠잤어요.
비공개 덧글입니다.
비공개님: 진짜…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그러면 너무 죄송한데-_-;;;;; 지어낸 얘기에요, 쿨럭.
모조님: 그러나 일년에 두 번이라서 굶어죽기 쉽상이죠. 그렇다고 시계 맞추는 사이에 잠자다가 일어날 수도 없고.
shin님: 일광시간절약제=서머타임, 이랍니다-_-;;;; 이 동네에선 여름이 좀 질기죠. 그나저나 맨체스터에 계시다니, 맨체스터=매드체스터가 늘 생각나서요. 한때 인스파이럴 카펫의 새턴 5 이런 노래도 좋아하고 해피 먼데이스 등등…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