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관계
대부분의 관계는 어떤 종류의 것이냐를 막론하고 희망 또는 그것에 무한히 수렴된 낙관과 함께 시작된다. 그리고 그 희망 또는 낙관은 바로 동질성을 향한 것이다. 피가 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는데, 그 이유인 즉슨 자기 자신은 물론 서로를 이해하게 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처음 알게 되고 관계를 맺게 되면 발견하는 아주 작은 동질성의 싹이라도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보다도 뻥튀겨진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경우, 그런 희망 또는 낙관과의 밀월관계는 그렇게 오래 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곧 자기가 발견한 동질성의 싹이 이성적으로 그다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확인하게 되고 그와 반비례하여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들이 생각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하여 희망 또는 낙관은 이쯤에서 실망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런 단계에 이르게 되면 보통은 관계 자체에서 한 발짝 물러나 닥친 상황에 대한 최대한도로 객관적인 검토를 하게 된다. 알고 보면 동질성이라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발견하기 어려운 특질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 벌써 그들은 ‘타인’ 으로 정의된다. 나 자신이 아니고… 따라서 타인이라고 정의되는 개체로부터 동질성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가능성도 꽤나 높은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상대방보다는 자신에게 문제가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예 동질성 따위를 논할 수 없는 인간형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대체 얼마나 많은 요소들이 객관적인 검토에 요긴하게 쓰일지는 몰라도 이 검토의 단계라는 건 그리 길게 가지 못하고, 대부분은 계속해서 커져만 가는 이질감에 다분히 기시감 Deja-Vu의 냄새가 나는 짜증을 느끼며 방황하게 된다. 거기엔 이 사람도 아니면 대체 어떻게 하나, 라는 무한궤도를 도는 사람찾기에 대한 짜증이나 사는게 다 이 따위지, 라는 대단히 불건전한 체념 따위가 주된 감정일 것이다. 감정상태가 그쯤에 이르게 되면 그 감정의 원천이 되는 관계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지극히 식물인간스러운 관계가 되는 것이다. 숨은 붙어있을지 몰라도 그건 그냥 관계의 실패를 ‘또’ 인정하고 싶지않아서 그저 방치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의미다. 이 방치의 단계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은 곧 껄끄러운 통보의 단계를 거치고서라도 이 의미없어진 관계에서 산소호흡기를 떼어내려고 하는데, 그 직전에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관계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마지막 재고의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타인이기 때문에 동질성을 찾는다는 것이 어불성설일 수 밖에 없고, 또 이질감이라는 것이 관계에서 어쩔 수 없이 동반되는 필요악스러운 불편함이라면, 즉 어느 관계에나 적용되는 지극히 보편적인 감정이라면 지금 이 죽어가는 관계에 지니고 있는 동질성에 대한 불가능성과 그의 반비례 짝으로써 존재하는 이질감에 대한 가능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건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고. 그렇게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극적인 치료약 또는 시술이 되어 죽어가는 관계의 의식을 회복시킬지, 그건 사실 아무도 모른다. 인정하고 받아들인다고 해도 관계가 죽어 나가 떨어지기는 마찬가지 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다. 관계에 딸린 수많은 문제와 어려움과 짜증 등등의, 부정적인 기표를 뒤집어쓰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그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분기점에서 덜덜 떨며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현명한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죽어가는 관계들에게 밤은 어둡고 춥고 길기만하다.
# by bluexmas | 2008/10/31 14:17 | Life | 트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