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잠의 아침
I’ll see you next spring, 이라고 내뱉어진 말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를 데려다준 남자의 스노우 모빌은 까만 점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인사 bye, 로 부터의 -ye는 그가 걸터 앉았던 스노우 모빌의 안장에라도 걸쳐타고 그 대신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것처럼 길게 꼬리를 남기며 그의 입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비자는 내가 가지고 있으니 -ye만 미국으로 다시 들어갈 일은 없겠지, 라고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I’ll see you next spring, 봄이 오면 연락할께… 그건 그가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사람인 친구 S에게 전화를 끊기 전에 건넸던 인사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봄이 언제가 될지는 그도 사실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사는 땅에서의 봄과 그가 지금 발을 디딘 땅에서의 봄은 그 길이도, 찾아오는 시기도, 그리고 분위기도 너무 달랐기 때문에 친구 S가 이제는 자식 좀 연락을 할라나, 라고 생각할 무렵에도 그는 계획했던 겨울잠의 반환점을 막 돌았거나 아니면 그 직전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달랐다, 여기와 거기는.
그렇다, 겨울잠이라고 했다. 아니, 동면이 아니고, 겨울잠. 그는 3분, 그러니까 전화카드에서 25.2 센트가 떨어지는 동안 S에게 설명했었다.왜 동면이 아니고 겨울잠인지. 몰라, 내가 미친 건지도 모르겠는데 왠지 겨울잠이라고 안 하고 동면, 이라고 말하면 잘 자다 말고 일어나야만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니까. 한자어가 차가운 느낌을 준다고 생각하는게 나 뿐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두 음절이다보니 자야만 하는 때까지도 못 자고 일어나야만 할 것 같은 느낌도 싫더라구. 그러니까 그냥 겨울잠이라고 하자고, 동면 대신에.
그러나 동면이든 겨울잠이든 어딘가 그렇게 간다고 마음도 먹고 말하는 것 자체가 그냥 미친게 아닐까. 눈밭을 걸으며 그는 생각했다.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이름 한 번 불러보라니까, 라고 누군가 얘기했던 그 눈 오던 저녁이 불현듯 생각났다. 그러나 그는 그 이름을 끝까지 입에 담지 않았다. 1989년이었다.
언제나처럼 회사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은채로 지하철을 타고 공항에 가서는 짐을 부치고는 남는 시간엔 우체국 언저리에서 시간을 보냈다. 먼저 전날 집에서 쓴 편지들을 부쳤는데 친구들에게는 그냥 별 말 없이 봄이 오면 연락할께, 라고만 썼고 집에는 당분간 두바이 지사에서 일하게 될거에요. 그 곳 사정이 어떤지 모르니까 연락 없어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시구요, 일단 6개월 예정으로 가는데 미국에 들어가기 전에 서울에 들렀다 갈꺼에요, 비자 때문에. 라고만 둘러댔다. 전화는 하지 않았다. 그래봐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는 데 필요한 정황적인 증거만 제공할 확률이 높으니까. 어차피 그는 감추는데 능한 종자도 아니었다. 하여간 그렇게 두 통의 편지를 보내고는 언제나 보안 검색대 근처 구석에 조그맣게 판을 벌려 놓은 코카콜라 기념품 매장에 가서 한참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북극곰 인형을 하나 산다. 각종 광고에서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게 가게에서 파는 인형 곰은 언제나 졸린 표정이었다. 오빠, 왜 이 곰돌이들은 언제나 졸린 표정일까? 광고에선 참 똘망똘망한데… 라고 누군가 물었던 기억이 났다. 중국제니까, 라고 그는 대답했었다. 가격표에다 19, 라고 적는다. 그러나 20번은 없을테니 이게 마지막, 이라고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생각해보니 그는 여태껏 18번까지가 제자리를 찾아갔냐고 물어보지도 못했었다. 아니, 그냥 부담을 줄 것 같아서, 라고 밖에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물어보는 사람이 설사 그 자신일지라도. 그래서 그는 아직도 7번 부터 18번까지의 행방에 대해 듣지 못했으나, 계절도 바뀌는 마당에 사람의 마음은 또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물어볼 수가 없었다. 마음 놓고 물어보지도 못하는 답답한 내 인생… 마지막으로 전화를 건 곳은 이동통신사로 전화 자체를 정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우체국에 들어서서 뽕뽕이가 종이 사이에 끼워진 봉투에 전화기를 담고, 역시 같은 봉투에 졸린 중국제 곰 인형을 넣어 보내고 나니 검색대로 향하는 마음의 문이 열렸다.
워낙 델타 항공의 기내식이라는게 소 여물보다도 못하기 때문에 식욕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지만, 그게 아니고라서도 그는 음식을 입에 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깨끗한 상태로 가고 싶었다. Are you OK, sir? I do believe you’ve got to eat something. 거기까지 말하고 내일 모레가 환갑일 것 같이 주름이 자글자글한 금발머리 아줌마 여 승무원은 허리를 깊이 숙여 나의 귀에 대고 I know our food sucks, but I am sure you do need to have some food to go somewhere far down the road 라고 말했다. 말보다 쌕쌕 내뱉는 숨소리에 귀가 간지러워 그는 그냥 I am fine, just let me have a glass of milk please 라고 답했다. 가급적이면 색이 같은 걸 먹어야 되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 발걸음을 향하는 곳과, 그리고 만나게 될 것들과.
날씨는, 감히 춥다고 생각할 수도 없을만큼 추웠다. 너구리털로 둘러싸인 파카의 모자를 푸욱 눌러쓰고서 그는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걸었다. 그러니까 맞바람을 안고 걷고 있었다. 비행으로부터의 피로, 시차 등등의 것들이 한데 뭉쳐 눈을 뽀득뽀득 밞고 가는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발걸음이 무거우면 눈이 더 푹푹 꺼질까? 그러나 출발한 날 아침부터 먹은게 없으니 사실은 더 가벼워서라도 그렇게 눈이 그렇게 많이 꺼지지는 않을 듯…사실은 출발하기 전날에도 야근을 했다. 회사에선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리둥절하겠지, 라고 생각하니 비틀린 쾌감이 느껴졌다. 그는 바로 어제까지도 아무에게 아무런 얘기조차 하지 않았다. 얘기를 해야될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돌아가지 않을거니까. 아침에 일어나서는 팀장 J에게 오늘 아파서 못 나가겠다는 메일을 날렸고, 공항에 도착해서는 사직서를 같이 일하는 임원들에게 각각 보냈다. 그동안 일할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다, 는 인사가 담긴 카드와 함께였다. 무슨 이유 때문에 그만두는지는 당연히 쓰지 않았다. 그냥 짤막하게 I need to move on, now 라고만 썼다. 카드를 보내야 될 임원이 여남은 명이었는데 각자에게 어울릴만한 카드를 고르는데 시간이 좀 걸렸었다. 세상일엔 참 뭐 하나 쉬운게 없지. 배에선 드디어 꼬로록, 하는 소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소리로 느낄 수 있는 배고픔마저 가물가물 의식 저편으로 사라질 만큼 먼 길을 걸어 왔다고 생각이 될 무렵, 아득하게 하얀 평원만 보이던 그의 눈 앞에 작은 덩어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다. 곧 작은 덩어리들은 큰 덩어리로 바뀌어 그를 둘러쌌다. 그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코카콜라 캔을 꺼내들었다. 매년 연말이면 나오는, 북극곰과 눈송이 따위가 그려진 한정판이었다. 콜라도 묵혀두면 와인처럼 맛이 좋아지냐? 책상을 옮길때마다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콜라캔을 발견한 M선배는 그에게 비아냥거렸다. 그렇다는 얘기를 들어서 지금 실험중이라니까요, 내년 크리스마스에 개봉 예정이에요. 물론 그건 그냥 우스개였고 그에게 따로 이유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2005년은…
콜라캔을 가지고 오는 절차와 과정은 은근히 번거로왔다. 일단 캔을 가지고 기내에 들어갈 수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부치는 짐에 포함시켜야만 했는데, 사실 그에겐 부쳐야 될 짐이 없었다. 돌아오지 않을 확률이 99%인 여행이니까. 그래서 트렁크를 온갖 쓰레기로 채우면서 콜라캔을 함께 넣을까 생각도 해 봤지만 보안검색에서 걸릴 가능성도 있었다. 부치는 짐이면 부치는 짐답게 적당히 무겁고 또 엑스레이로 훑어보아도 진짜 여행을 위한 짐처럼 보여야만 할 것 같았다. 세상일엔 참 뭐 하나 쉬운게 없지… 결국 그는 커져서 더 이상 입을 수 없는 옷가지들로 진짜 여행을 위한 짐처럼 보이는 트렁크를 싸서는 그 안에 콜라캔을 담았다. 도착해서는 화장실에 들러 캔을 꺼내고는 트렁크는 버리고 길을 나섰다. 공항에선 난리가 났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에게는 관심밖의 일이었다.
어쨌든, 그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덩어리들 사이로 발걸음을 옮기며 그는 원하는 대상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다들 거의 비슷하나 조금씩 다른 얼굴들, 그러나 덩어리의 무리 거의 끝에서 그는 찾을 수 있었다. 어차피 서로 나눌 수 있는 말은 없는 바, 그는 캔을 들어 그려진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덩어리는 고개를 끄덕, 했다. 그리고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캔의 그림 속에서,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한 팔에는 콜라병을, 또 다른 팔에는 아들인지 딸인지 모를 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 아이는 어디로 간 걸까. 궁금했지만 나눌 수 있는 말이 없으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물어보는 것 자체가 상처가 될 수 있을 것도 같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그렇게 나눌 수 있는 말이 없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눌 수 있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머니에게 아주 가끔 동생에 대해 물어보았고, 아주 나중에서야 그게 상처를 계속해서 건드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었다. 그의 뒤를 따라 동굴로 막 발을 들여놓는데 그 아이는 자연으로 돌아갔지, 라는 말이 뜬금없이 기억났다. 그리고 이제는 나의 차례.
어둡고 축축한 동굴이었다. 동물원에 가면 늘 맡을 수 있었던 퀴퀴한 냄새가 기대처럼 코를 찌르며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 그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등을 돌려 내가 쫓아오는지 확인하지 않았고, 동굴에 들어와서는 언제나 누웠을법한 자기 자리를 찾아서는 몸을 바로 눕혔다. 어디가 좋을까, 그는 가방을 내려놓고 선채로 잠시 생각했다. 바로 옆은 그의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 역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동굴은 넓었다. 그는 혹시라도 벌써 잠에 빠졌다면 깨우고 싶지 않았으므로 깨끔발로 머리쪽을 향해 움직였다. 아랫목보다는 웃목, 명절이면 그렇게 가고 싶지 않던 할아버지 댁, 식구들은 누구를 위해 준비하는지도 모르는 음식들을 위해 자정 넘어서까지 일을 하다가 안방에서 다 같이 잠을 청했는데, 그는 언제나 웃목에서 자겠다고 고집했다. 당신 아들과 며느리에게는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도 없이 냉정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자식들이었던 두 손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자상했던 할아버지는 초등학교에도 채 들어가지 않았던 손자에게 가장 따뜻해던 아랫목, 당신의 옆자리를 제안했지만 그는 언제나 저는 찬 바닥이 더 좋아요, 라는 말로 그 제안을 물리치곤 했었다. 거리를 두고 싶었었다. 그리고 그 거리는 그 양반이 자연으로 돌아갈때까지도 의도적으로 유지되었었다, 그리고 이제는 나의 차례.
요도 이불도, 그리고 베개도, 아무것도 없는 하얗고 차가운 바닥에 몸을 눕혔다. 그 옛날 그렇게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웃목에 몸을 눕혔을때 느꼈던, 그 싸늘함이 등골을 이내 파고 들었다. 그러나 손님을 위해 서걱서걱하게 풀을 먹여 촘촘하게 바느질한 요는 없었다. 그때는 그렇게 겨우 한 사람과 한 방에서 몇 발짝 거리를 두었다는 사실로 마음이 편했었으니 지금 이렇게 그 모든 사람들과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따라잡을 수도 없는 거리를 두었다는 사실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도 모르는 편안함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 편안함은 이내 잠기운으로 치환되었다. 피곤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가는 관계와 관계 사이, 그리고 그 관계와 관계의 사이에 생기는 거리와 거리 사이의 어딘가에 자신을 놓아야만 되는지 끝없이 계산하고 또 그 결과를 검토 및 재검토 하는 사이에 그는 지쳐있었다. 이젠 춥더라도 웃목에 몸을 누임으로써 하룻밤의 불편함을 피할 수 있는 정도의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게되었을 때, 그는 그 모든 것을 붙잡고 안달하기엔 가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동굴 밖으로는 해가 지고 있는 듯, 그의 등 뒤로 밝은 기운이 조금씩 잦아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에게는 밤이, 겨울잠에게는 아침이 찾아오고 있었다. 언제나 세상 만물은 그렇게 짝을 찾아 균형을 이루는 방식으로 각자를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어디엔가 아침이 찾아오면 또 다른 어디엔가는 밤이 찾아오듯, 내가 불행해지면 어디에선가 누군가가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었고, 그 반대로 내가 행복해지면 누군가의 행복을 빼앗아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었다. 그렇게 끝없이 돌고 도는 세상 만물의 존재 궤도 가운데에서 이제는 자신을 내려놓고 싶었다. 피곤했다. 잠은 너무나도 거침없이 밀려왔다. 배에서는 계속해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이름 한 번 불러보라니까. 그러나 그 이름은 아주 처음부터 그에게 주어진 이름이 아니었다. 그건 눈에게 주어진 이름, 눈의 이름이었다. 그렇게 그도 돌아가고 있었다, 자연으로.
# by bluexmas | 2008/10/27 02:21 | — | 트랙백 | 덧글(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