맺고 싶지 않았던 관계

작년 초에서 여름 사이였나, 사무실 내부 수리 때문에 다른 회사랑 나눠쓰는 층의 임시 사무실에 세들어 있을 때 오다가다 얼굴을 자주 마주친 또래의 남자가 있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잠시 빌린 24층에는 치과와 무슨 투자 자문회사 같은 finance 계통의 사무실이 두 군데 있었는데 그 중 한 군데에 다니는 남자였다. 미국애들이야 뭐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이도 오다가다 인사도 잘 하고 별 내용없는 대화도 나누고 그러는지라 그렇게 오다가다 스쳐지나가고 인사를 나눠도 난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점점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지더니 이 남자-미리 밝혀두건데 결혼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오해하는 사람이 꽤 돼서…-가 점심을 한 번 같이 먹자는게 아닌가. 지금도 기억을 더듬어보면 사실 그렇게 사람을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회사를 다니면서 거의 언제나 점심 시간은 나 혼자 조용히 가지는게 오후의 일을 위해 좋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또 까놓고 거절을 잘 못하는게 나라는 사람이다보니 뭐 그냥 밥 한 번 같이 먹어주지, 라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응해주었다.

뭐 다니던 회사에서 예상했던대로 대학에서 재무를 전공한 사람이었고 말하는 억양에서 짐작했던대로 텍사스 쪽에서 왔는데, 그렇게 간단한 각자의 소개를 나누고 나니 별로 할 말이 없었다. 그 남자는 내가 외국에서 왔다고 하자 가장 뻔하면서도 대답하기 싫은 질문인 ‘미국이 좋냐, 아니면 너네 나라가 좋냐’ 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졌는데, 뭐 그런 질문이 내 기분을 좋게, 혹은 나쁘게 만들었냐를 생각해보기 이전에 일단 이런 걸 물어본다는 상황 자체가 나 같은 외국인 친구는 없다는 의미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난 이 남자가 왜 나랑 안면을 트고 싶어했을까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언제나 사람 사이에 대화거리가 없어서 침묵이 시작되면 불편해하는 사람이다보니, 화젯거리가 없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가 보려고 이런저런 화제를 꺼내놓고 얘기를 했는데 정말 별로 할 얘기가 없었다. 이를테면 책 얘기가 나와서 무슨 책을 읽냐고 물어보면 100% 자기 일에 관련된 재무관련 서적이라고 답을 하니 그 쪽에 전혀 지식이 없는 나로써는 거기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냥 모든게 그런 식이었다.

그래도 한 시간이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므로 그럭저럭 밥을 먹고 회사로 돌아오는데 그 남자가 말하기를 자기는 이런 저런 모임에 참석하고, 주말엔 어떤어떤 활동을 하니까 다음엔 한 번 같이 가보자고… 나는 뭐 미국식으로 그래 참 좋은 생각이다, 라고 맞장구를 쳐 주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뭐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면 공통관심사도 있을 수 있고 그래서 더 친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을지, 시도해보지 않아서 뭐라고 말할 수 없었지만 왜 그런지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그건 사실 인간성이랄지 개인적으로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취향은 거의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린 결론과 같은 것이었다. 이 사람이 대체 왜 나를? 이라는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것도 사실은 그렇게 큰 영향력을 미치지는 않았다. 실리만 놓고 따져보면 재무회사 같은데 다니는 친구 하나 둬서 나쁠 것 하나 없을지 몰라도 또 그런 실리적인 이유로 친구를 ‘만드는’ 것에 조차 나는 능숙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불편함이나 어색함을 참아가면서 관계를 이어나가려고 애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유를 참 많이도 늘어놓았는데, 그냥 한마디로 말하자면 귀찮았던 듯… 그래서 그 이후에도 오다가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긴 했지만 나는 그냥 일상적인(=표면적인) 인사만 나누었고, 밥 한 번 또 같이 먹자는 얘기에도 그래 내가 스케쥴 봐서 메일 보낼께, 라는 회피성 대답(말단 사원이 스케쥴이 있을리 없으니까 회피성…)만을 날리며 사무실 내부 수리가 끝나는 시기만을 기다려 28층으로 도망치듯 올라갔는데, 그 전에 그 남자의 사무실이 망했는지 옮겼는지 이사를 가 버리는 바람에 나는 임시 사무실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조금 마음 느긋하게 보낼 수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직도 다른 의도에서보다는 그냥 순수하게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응대를 제대로 못 해준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 그가 다니던 회사가 세들어 있던 공간이 비워지는 것을 보고 밥이라도 한 번 같이 먹어야 되나, 라는 생각도 잠시 했던 것 같은데 명함을 찾을 수가 없었고 나중엔 그냥 모든게 귀찮게 느껴졌다.

 by bluexmas | 2008/10/07 13:09 | Life | 트랙백 | 덧글(3)

 Commented at 2008/10/07 18:2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zizi at 2008/10/07 23:59 

‘순수하게 친해지고 싶은 마음’의 생성을 스스로 겪기가 힘들고, 그것의 존재를 부인하게 만드는 인간관계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제 경우) 소위 ‘붙임성있는’ 사람들이 어쩐지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순전히 경험으로 체득한 살아있는 학습을 통한 것이서인지 잘 고쳐지지가 않더라구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10/08 13:40 

비공개님: 그렇죠? 그런 인간관계는 풍요속의 빈곤이에요. 많아질수록 더 쓸쓸해질뿐이죠… 그런 관계를 안 만들려면 정말 최선의 노력이 필요해요.

zizi님: 저도 밖에 나가면 붙임성 있는 사람으로 소문난터라… 그것도 제가 가진 가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많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