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복도
그 해에도 역시 나는 겨울대신 겨울의 복도가 찾아오는 도시에 머무르고 있었다. 일곱번째로 맞는 겨울 대신의 계절이었다.
겨울의 복도는 길고 좁았다. 그 길고 좁은 복도에 배의 그것을 닮은 동그란 창문이 간간히 뚫려있었고, 그 창으로는 겨울의 풍경을 내다볼 수 있었다. 복도 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내다만 볼 때 품게 될법한 기대나 환상처럼 창 밖의 겨울 풍경이 늘 아름답기만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나날들에 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겨울 풍경, 즉 펄펄 내리는 눈이랄지, 그 눈으로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이랄지, 크리스마스의 불빛이나 그 아래에서 사랑의 눈길-또는 신체접촉도, 눈길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얼마든지-을 나누는 연인이랄지, 뭐 그런 것들이었지만 때로는 스케이트를 타러 얼어붙은 집 앞 호수로 나갔다가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채 얼음 밑에서 떠다니는 아이의 생기 없어진 눈동자나 눈 덮은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남자의 외침과 그 외침을 송두리째 덮어버리는 바람의 꿈틀거림 등이 보일때도 있었다. 어느 날은 늑대에 찢겨진 사람의 사지가 눈으로 덮인 벌판에 나뒹굴고 있는 광경이 보이기도 했다. 피는 생각보다 검붉어서 흰 눈 위에서조차도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그 찢겨진채 나뒹구는 사지가 그 전에 보았던 길 잃은 남자의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고 확인한다고 해도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내가 머무는 곳은 겨울의 복도였으므로.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겨울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내 스스로의 발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와 겨울에 들어설때까지는.
…하루 종일 손도 대지 않았던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으로 우체국의 홈페이지에 접속해 한 번에 가능한 가장 긴 기간동안 우편물을 맡아달라는 신청을 하고 나는 이를 닦았다. 그러는 와중에 거울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이제서야 기억에 분명한 표정을 계속 지어보았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복도의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겨울쪽의 끝이었다. 대략 스무 걸음쯤을 걸어 문 앞에 다다랐다. 하얗게 칠해진 문에 손때는 별로 묻어있지 않았다. 문고리를 손으로 감싸 잡았다. 냉기가 느껴졌다. 겨울의 냉기였다. 오랜만의 이 낯선 느낌, 숨을 한 번 훅, 들이쉬고 문을 열었다. 절반쯤 열자 바람이 나머지를 떠 맡았다. 그리고는 복도로 새어들어왔다. 눈발이 간간이 섞여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코트의 깃을 여미고 스웨터와 색을 맞춘 목도리를 다시 한 번 동여매었다. 평소엔 두통을 불러와 잘 쓰지 않았던 털모자도 눈썹 바로 위까지 눌러썼다. 큰 머리에 맞는 모자를 떠주겠다며 언젠가 겨울이 있는 도시에서 머물렀을 때 만났던 사람이 함께 떠 준 자주색 장갑도 두 손을 깍지끼어 손가락과 손바닥이 이어지는 부분까지 꾹꾹 눌러씌웠다. 이제는 준비가 다 되었다. 신고 있던 연한갈색의 스웨이트 부츠와 회색 아가일 양말을 벗어 복도쪽의 문가에 가지런히 놓고는 발걸음을 디뎠다. 두 발을 오랫동안 떠나있었던 겨울의 땅에 대자 차가운 평온함이 아련하게 차올랐다, 채 눈을 깜빡하기에도 버거운 순간에.
바야흐로 눈의 이름을 위한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by bluexmas | 2008/09/23 11:57 | — | 트랙백 | 덧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