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대학 3학년 땐가, 어찌어찌해서 1학년 제도와 설계를 들어야만 했는데 2학기 설계 수업에 계단을 만들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과제 마감날이 되어서 스튜디오엘 가니 벼라별 계단이 다 있었다. 특히 에셔의 그 유명한 계단 그림을 보고 만든 계단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어차피 실제 세상에서는, 특히 3차원에서는 구현이 불가능한거니까 그냥 그 노력이 가상했다고… 하여간 그렇게 온갖 형태의 신기한, 또 대부분이 대학 새내기니까 거칠은 계단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나는 그냥 아무런 특징도 없는 어떤 건물, 아니 아무 건물의 계단을 만들어 갔다. 1층에서 2층에 올라가는 계단, 뭐 혹은 2층에서 3층이어도 상관없고 그냥 하나의 층에서 또 다른 층을 올라가고  내려갈때 쓰는 특징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그래서 그 에셔의 그림을 닮은 계단과 또 온갖 거창한 계단들 사이에서 적당히 벌쭘해 보이는 그런 계단.

사실 그 계단은 계단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 계단에 곁들여지는 짧은 얘기를 썼다.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고 그 때 쓴 글들은 다 어디론가 없어져서 재현은 불가능하지만 대강 줄거리는 이랬다. 그 계단은  어떤 남자와 여자가 연애를 할 때 잘 가던 까페가 있는 건물의 계단이었다. 남녀는 만나면 많은 시간을 그 까페에서 보냈고 따라서 그 계단을 올라 까페엘 가야만 했다. 까페는 건물의 2층에 있었다. 그 당시엔 상상력이라곤 정말 빈곤하다고 말 할 수 있을 정도조차도 없었기 때문에 대체 왜 남자가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 그 이유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지어내지 못했지만, 남자는 결론적으로 여자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는 마지막으로 그 까페에서 만나 관계를 끝내려는 자기의 의사를 ‘통보’ 하려고 약속을 잡는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장소에 다다르는데 여자가 벌써 도착해서 자기가 오는 것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는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라가면서 그동안 여자와 만들었었던 기억을 하나씩 떠올리고 또 지우려 한다. 그날따라 계단을 더디게 오르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말하자면 그냥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상적인 장소나 공간에 기억이 깃들여지면 또 어떤 의미가 될까, 에 대한 생각 또는 궁금증이라는게 늘 있었다. 이를테면 또 연애와 결부되는 얘기지만 맨날 여자친구를 데려다 주던 길 어딘가에  있던 몇 번째 가로등, 뭐 이딴 것들은 사실 일반적으로는 거의 의미가 없지만, 개인의 기억과 경험의 단계로 훑어내려가다보면 그렇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경우도 있게 된다. 예를 들면 뭐 공중전화가 아직도 만인의 통신수단이던 시절 누가 누군가와 오랫동안 통화를 하던 어느 인적 드문 동네 호젓한 골목길 전봇대 밑에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공중전화부스, 그것도 문이 있어서 기다리는 사람-도 거의 없기는 하지만-이 낯 간지러운 대화를 엿들을 기회를 원천 봉쇄하는, 그러나 여름엔 땀에 흠뻑 젖어버리는 그런… 뭐 그런 생각을 어떻게 과제에 불어넣어 보려고 시도를 했던 것 같은데 반응은 뭐…당연히 신통치 않았지. 내가 그때 했던 건축 관련 모든 것들이 다 그랬듯.

그런데 남자가 헤어지려 했던 이유는 대체 뭐였더라? 여자가 여름이면 팥빙수를 너무 많이 먹고 배아프다고 칭얼거리는게 지겨워져서였던가?

 by bluexmas | 2008/09/17 15:49 | Architecture | 트랙백 | 덧글(4)

 Commented at 2008/09/18 02:2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8/09/18 06:1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8/09/18 06:2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9/18 13:29 

비공개 1님: 그게 사실은 저의 희망사항인데 문제는 건축은 취미로 할 수가 없는 직업이라는거죠. 취미로는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아요. 희망본업쪽으로 자리를 잡을 수만 있다면 건축은 안 하고 싶은게 사실 소망이죠. 전 image-oriented된 인간이 본질적으로는 아니거든요. 이걸 하고 싶어서 선택했고 그러다보니 수많은 반복속에서 어느 정도는 그게 가능해졌지만요.

제가 글을 쓰는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기록이다보니 읽으시다보면 그런 느낌을 받으실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떤 부분은 제가 의도적으로 언급하는 걸 회피하기 때문에 여기 있는 글들 전부를 모아도 하나의 완결된 서사구조나 이미지가 형성되지는 않을거에요.

사실 그렇게 말씀하신 것들을 글로 쓰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닌데, 항상 시간에 쫓기다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리죠. 저에게도 글을 쓰는 목적이 있는데 사실 그런 글들은 저의 목적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안 쓰게 되더라구요. 이제는 더 이상 영화에 관련된 글이 안 올라오는 걸 알아차리셨다면 아마도… 음식에 관련된 글도 비슷한 이유로 잘 안 쓰게 되는거죠. 음식을 안 해먹어서 그런게 아니구요. 그리고 글이 무채색 같은 건 제가 쓸 때 감정의 많은 부분을 습관적으로 가지쳐서 그렇게 느끼실지도 몰라요. 얘기하신 건 정말 왜 잘 안 쓰는지 생각해서 글 한 번 써봐야 겠네요^^

정말 블로그 안 하시면 메일 주소라도 알려주셔야 되는거 아니에요?^^;;;

비공개 2님: 그래서 결국 계단은 그냥 계단, 글은 그냥 글로 남았고 교수는 교수대로 그게 뭔데? 라고 물었죠. 저는 학교에서 재능없는데 유학가는 인간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어서 집에 돈을 쟁여놓고 사는거 아니냐는 근거 없는 소문도 상당했다는…^^;;; 그리하여 제 과제작업은 사실 별로 볼 게 없답니다, 안타깝죠?

비공개 3님: 제가 원래 사람이 너무 많은 식당, 바 이런데는 잘 안 가는 사람이 되어버려서 그런가봐요. 말씀하시는 거, 저도 다 똑같이 생각하니까 마음 놓으셔도 될 듯(친한척 친한척-). 전 올릴만한 글도 쓰지 않지만 밸리에 올리지 않은지도 꽤 됐고 여기 오시는 분들 블로그 아니면 또 잘 안 가게 되고 해서 늘 조용한 요즘이네요. 항상 꾸준한 손님 수에 꾸준한 수의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