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오는 모험담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은 생애 최악의 것이었다. 날아가고 있는게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로 낡은 비행기는 덴마크인 단체 관광객인듯한 사람들로 완전히 가득차 있었는데, 이 사람들 이렇게 매너도 없고 시끄러울 줄 몰랐다. 우리나라에서 아틀란타를 오가는 비행기를 그래도 여러번 타봤기 때문에 아수라장인 비행기에는 그럭저럭 단련이 되어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정말 완전 착각… 미친듯이 큰 소리로 얘기하는 건 뭐 그냥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고, 10분에 한 번씩 일어나서 트렁크를 꺼내서는 열어제끼고 뭔가 찾는 아저씨에, 5분마다 한 번씩 일어나서 30분씩 복도에 서 있는 할아버지… 가장 어처구니 없는 경우는 비행기가 막 착륙해서 모두 안전벨트를 얌전히 매고 앉아 있는데 손자인듯한 남자애한테 착륙하는 순간의 창 밖 풍경을 보여주겠다고 막 땅에 바퀴를 내리고 있는 비행기에서 복도 반대편에 앉은 아이를 데려다가 자기 무릎에 앉히는 할머니. 그리고 아저씨와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꼬마는 모두모두 한 가족.거기에 세계 최악의 델타 서비스와 음식을 합하면 이건 뭐 그냥 지옥이었다. 나는 입 안 세 군데가 헐고 생각보다 그 기운이 만만치 않은 감기에 괴로와하고 있었는데, 날씨가 따뜻한 집에 가면 좀 나아지겠지, 라는 막연한 희망을 안고 모든게 터지기 직전의 상태를 부여잡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둑의 여러군데에 작은 구멍이 나서 물이 새는 걸 간신히 간신히 틀어 막으며 어떻게든 둑이 완전히 터지지 않기만을 기도하는 상황같았다고나 할까. 정말 상황이 나빠져서 이렇게 긴 휴가를 보내고 회사에 제대로 나갈 상황이 못 되면 안된다는 약간 필사적인 마음이 있었다. 뭐 여행이랍시고 너무 싸돌아 다녔던 것도 문제였지만 날씨가 정말 생각한 것보다 너무 추웠던 것이 피로감과 감기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어쨌든 그 모든 걸 싸안고 버티기에 열 시간은 조금 버거웠다. 잠도 자기 어려웠고 정작 잠이 든 어느 순간에는 앞자리의 할아버지가 화장실에 갔다오다 발을 너무나 아프게 밟는 바람에 깨어났다.
그러나, 이렇게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을 정말 간신히 버티고 비행기가 막 땅에 닿는 순간, 그 날이 일요일 오후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이 모든 지옥이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비하면 단지 전주곡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국내 여행만 갔다와도 주말엔 항상 지옥과 같은데가 아틀란타 공항-이 공항의 교통량은 상상을 초월하는데다가 시스템이 너무 비효율적이다. 짐을 일단 찾은 뒤 다시 부쳐야 하는 어이없는…-인데 입국심사를 거쳐야 한다면? 비행기를 빠져나와서 미친듯이 몸을 움직이는데, 같은 시간에 세계 각국에서 도착하는 비행기들에서 온갖 인종들이 정말 어디 뭐 터진 것처럼 쏟아져 나온다. 아, 오늘 #됐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심사대가 직원으로 채워져 있는 것도, 그럼에도 입국심사장에 발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정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게다가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컴퓨터 시스템이 다운되었단다. 얼씨구…
결국 예상한 것처럼 정확하게 한 시간을 기다려 심사대에 선다. 예상했던 것처럼 입국심사원은 잔뜩 짜증이 나 있었다. 보통 방문비자라도 H-1b 같은 경우엔 아무 것도 묻지 않는데 가시돋힌 목소리로 어디를 갔냐, 얼마나 나가 있었냐, 왜 갔냐를 묻고는 내 비자가 15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까지 참으로 친절하게 상기시켜준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심사대를 나선다. 미국에 들어오는 건 이렇게 쉽지 않다. 심지어는 코펜하겐 공항에서마저 직원들도 불친절했고 1킬로그램 더 나간다고 490크로너를 더 내던지 짐을 다시 분류하라고 해서 고무줄로 묶어 놓은 가방을 다시 열어서 트렁크의 짐을 옮겨 담아야만 했다. 뭐 1킬로그램 넘은 것도 넘은거 아니냐고 반박하면 할 말은 없지만…
한참 시간을 끌어서인지, 짐은 벌써 컨테이너를 스무바퀴쯤 돌다가 지켜 자빠진 것 같은 형국이었다. 일단 짐을 찾고 세관을 지난 다음, 또 다시 짐을 부치고 보안검색을 거친 다음에 기차를 타고 입국장으로 나가야만 한다. 세관을 거친 다음 면세점에서 산 간단한 선물들을 트렁크에 넣고 다시 부친다. 보드카를 한 병 샀는데 이건 또 들고 들어갈 수가 없어서 부칠때 반드시 트렁크에 넣어야 한단다. 입국심사장에서 한 시간도 기다렸는데 뭐 이쯤이야…보안검사까지 마치고 나자 마음이 좀 홀가분해진다. 기차를 타고 입국장에 들어선다. 무슨 날인지 사람을 기다리는 리무진 기사들이 많던데 나를 기다리는 것도 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뭐 아니면 그냥 친구라도… 공항에서 지하철을 타고 회사까지 가서 차를 찾는 것도 오늘 같은 날은 블로그에 글 하나를 쓸 수 있을만큼 긴 여행이라서.
하여간 이제 짐 찾고 가기만 하면 되겠네, 라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입국장에 들어섰는데 그런 안일한 생각이 또 공항의 노여움을 샀는지, 첫 번째 가방이 나오고 20분이 지나서야 두 번째 가방이 나와서 나는 배가 고픈데 피자라도 시켜 먹으면서 기다려야 되나, 라는 생각을 했다. 같은 시간에 더블린에서 들어오는 비행기가 있었는데 그걸 타고 온 아일랜드 사람 둘이서 그 특유의 억양으로 빈정거리는데 어찌나 나와 코드가 맞게 들리던지, 이 나라 사람들이 다 이렇다면 가서 살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결국 비행기가 땅에 닿고 나서 가방을 찾는데까지 세 시간이 들었고, 지하철을 타고 회사까지 와서 차를 끌고 쌀국수집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오니 일곱시 반, 결국 집에 돌아오는 여행은 호텔을 가장한 모텔을 나서고 나서 꼬박 스물 네 시간이 걸리는 모험으로 변해 나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나는 밥을 해서 한 끼 더 먹으리라는 계획마저도 이루지 못한채 잠에 빠져 오늘 아침 여섯시에 눈을 떠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출근했다. 현실로 돌아오려면 하루라도 더 빨리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현실은, 일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낯설었다. 그러므로 이번 여행으로부터 나는 이루고 싶은 것을 이뤘다. 기쁜 마음에 밭은 기침을 몇 번 내뱉었다.
# by bluexmas | 2008/09/16 10:48 | Life | 트랙백 | 덧글(7)
비공개 덧글입니다.
이번 여행은 아예 비현실처럼 느껴지고 있어요. 정말 갔다온거야? 이런 생각이 이틀만에 드는데요?
basic님: 고생은요, 놀러간건데… 🙂 지갑은 완전히 비우고 마음만 채워서 돌아왔다고나 할까요^^;;;
비공개 덧글입니다.
그리고 짜투리가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또 요즘 그러신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거죠. 원래 사람을 기쁘게 만드는 것들은 거의 대부분 아주 거창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저거든요.
하여간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기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