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떠난 기억의 정원에서
어제는 세상을 떠난 기억의 정원에 들렀다, 키가 큰 나무들이 무성했는데 가지는 밑둥으로부터 가능한 높은 곳에서부터 팔을 뻗치고 있었다. 세상을 떠난 이들 때문이었다. 때로 그들을 잊지 않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세상을 떠난 이들 대부분은 한때 영혼으로 채웠던 육체를 이제는 무료함으로 밖에 채울 수 없고, 그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삶의 기억에 대한 혼잣말을 늘어놓게 된다. 처음에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듣던 나무들은 곧 끝없이 반복되는 혼잣말에 질려버리게 마련이고 결국 땅, 세상을 떠난 이들이 묻힌 곳과 거리를 두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팔을 치켜 올리고 발 뒤꿈치를 세우게 된다. 때로는 몸도 비틀어댄다.
나무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을 떠난 이들은 끝없이 무료하다. 그 무료함이 절절히 배어든 혼잣말은 곧 공기를 가득 메운다, 그리고 곧 바람이 된다. 나무들은 흔들린다, 아니 흔든다. 자신의 몸을 흔든는 소리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혼잣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라고 그 이유를 둘러대지만 사실은 흔들리고 있다.
무료함 가운데 다행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은 그렇게 다닥다닥 붙어 누워서 끊임없이 혼잣말들을 읊어대면서도 입씨름만은 하지 않는다. 삶 이후의 삶-아직 영혼으로 육신을 채운 사람들이 죽음이라 일컫곤 하는 그것-에서는 입씨름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깨닫게 되는 것이다. 관 뚜껑이 닫힐 때, 아니면 첫 삽의 흙이 그 닫혀진 관 뚜껑에 막 얹힐때. 그리하여 평화롭다, 이 세상을 떠난 기억의 정원은, 그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늘어놓는 삶의 기억에 대한 혼잣말로 가득해도, 그래도 평화롭다. 나의 혼잣말은? 나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혼잣말로, 하지만 아직은 영혼으로 채워진 육신에서 흘러 나오는 그것으로. 아직도 두려움은 시기상조의 열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만큼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고 믿고 있음에도 이런 장소에만 나의 육신을 옮겨 놓으면 그 열매가 탐스럽게 익어 곧 땅에 떨어질것만 같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될까 두려워진다. 그래서 나는 이런 종류의 장소에서 큰 바늘이 한 바퀴를 온전히 돌아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머물러 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나의 불길 역시 끝이 있는 심지를 태우고 있다는 사실을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된다는 진리처럼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그래서 큰 바늘의 여정이 1/12만큼 남았을 때 정원의 출입구로 나의 육신, 아직도 영혼으로 채워져 있는 그것을 옮긴다. 세상을 떠난 이들은 혼잣말에 여념이 없는지라 때가 되면 그들과 혼잣말을 같이 늘어놓을 동무 아닌 동무가 될 내가 자신들의 정원을 떠난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나 역시 그들의 여가 아닌 여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깨끔발로 자리를 뜬다. 혼잣말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바람은 계속해서 분다, 나무들은 계속해서 흔들거나 흔들린다. 세상을 떠난 기억의 정원에서도 그 모든 것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만 있는데 왜 아직도 육신을 영혼으로 채우고 있는 자들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단절, 이라고 그렇게 조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슬퍼하고만 있는지, 같은 운명을 가진 나 조차도 선뜻 이해할 수 없는 하루를 보냈다. 그러니까 어제는 세상을 떠난 기억의 정원에 들렀단 말이다.
# by bluexmas | 2008/09/04 08:32 | — | 트랙백 | 덧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