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법 세계로부터의 환상(3): 처음부터 빛 바랜 기억
아무래도, 이젠 때가 된 것 같죠? 나도 그렇게 얼굴이 두꺼운 사람은 못 돼서 내가 남을 어떻게라도 불편하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오래 못 버티는 것 같아요. 그동안 노골적으로 불편한 티 안 내느라고 힘드셨겠어요.뭐… 엄청난 해피엔딩 같은걸 기대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가끔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적인 도움 같은 것 받고 거쳐 가고 싶은 시기가 찾아오기 마련인데, 그런때 좀 도움을 받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한 편으로 내가 잘못 짚었다는 생각도 들고,
또 다른 한 편으로 내가 꽤나 오랜동안 가졌던 환상도 이제는 다 증발한 것 같으니 나도 더 이상 나를 우습게 만들지는 말아야 되겠다는 결론에 드디어 도달한거죠.뭐 내가 이렇게 하지 않아도 잠잠하면 얘가 사라졌나보다 생각하고 말테니 사실 이건 저를 위한걸거에요. 이래야 내가 다시 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할때 미친척하고 찾지 않을테니까.
그리하여 이것은 저에게 마지막 남은 창문이었습니다. 지난전에 내가 사람들하고 별 얘기 없이 지낸다고 했을때, 왜 그러느냐고 물었던 것, 기억 나나요? 사람들에게 감정을 구걸하는 것 같은 느낌이 싫어서, 조금이라도 그렇게 느껴질만한 것들은 다 정리했는데, 저 스스로도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꽤나 오래 버텼네요. 바로 이런게 너무 싫었어요. 약해지는 건 싫으니까.
그럼, 물러갑니다. 앞으로 다시 이런 해프닝은 누구에게도 만들지 않을거에요. 내 안의 외로움이 자라고 자라 결국 나를 잠식한다 해도.
모든 건 그 반쯤 남은 맥주잔을 급하게 비우는 순간에 이루어졌다. 환상이 현실로 바뀌고 현실이 문을 여는 사람이 되고 걸어오는 사람이 되고 또 마주보는 앞자리에 앉는 사람이 되었다. 뭐야 이건, 제대로 3류 소설 같은 느낌이잖아, 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말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입의 움직임으로 말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귀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은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나니 정신이 없어진건지, 뭐라고 말하는지 잘 들을 수가 없는데요? 라고 얼버무렸지만 속으로는,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솔직히 빈 속에 마신 맥주 몇 병에 달큰하게 취해서 듣는게 별로 신경을 안 썼던게 정확한 상황일거에요, 라고 얘기하리라 마음먹었다.
물론 그런 순간이며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저 돌아가기 전에, 밥이나 같이 먹죠. 오늘은 사실 약속이 있어요. 약속이 있던 건 사실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 약속은 일부러 만든 것이기도 했다. 결국 입은 옷 때문인지 영 몸도 마음도 불편했고, 뭐가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 편하게 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건 전부 욕심이었다. 그냥 얼굴만 보고 간다고, 처음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나? 몇날 몇일, 또는 여러해가 지난 어느 늦가을 저녁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얼굴만 보고 간다고, 라고 실없이 혼잣말을 한 번 했었다. 여름이 기나긴 동네의 늦가을답게 스산함의 끝자락에 포근함이 아주 살짝 묻어나는 저녁이었다. 말을 입에 담았던 사람은 곧 안도감을 느낀 사람의 표정으로 그러시죠, 마침 저는 회사에 다시 들어가야 될 것 같아서요, 라고 말했다. 지도로 확인했던 위치가 맞는 것이었는지 확인도 할 겸, 그는 회사에 다시 들어가봐야 되는 사람을 목적지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회사는 그가 한참 서서 기다렸던 그 가정집스러운 건물 바로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지는 골목에 있었고 여전히 가정집 분위기이지만 그래도 제법 사무실스럽게 생긴 빨간 벽돌 건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날 아침에 얼핏 봤는데 설마,했어요. 회사에 다시 들어가야 되는 사람은 회사 문에 한 발을 들여놓으면서 한 때 설마했던 사람으로 변했다가 건물 안쪽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는 사람이 되었다. 다음에 만나면 뭘 먹어야 될까. 약속장소로 지친 몸을 옮기면서 그는 여러가지 메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지우고 또 떠올렸다 지웠다. 벌써 떠난지 몇 년이 지나고 나니 대체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이렇게 생각이 안 나서 뭐 밥이나 먹게되겠어, 라고 그는 자신을 살짝 타박했는데, 결국 오랜 생각과 인터넷 검색 끝에 그럴싸한 메뉴는 생각해내고야 말았지만 밥을 먹을 순간이며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사라진 사람이 건물 안쪽 뿐만 아니라 이동통신망에서도 자취를 감춰버렸으니까. 바빠서요. 그 말보다 현대사회에서 거부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해주는 종류가 있던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돌아오기 직전 기억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그 바쁜 사람을 바쁜 사람답게 한 번 스쳐지나치기는 했지만 그게 끝이었고 그는 밥을 한 끼 덜 먹어서 배가 고픈채로 바다를 건너 돌아왔다. 돌아와보니 꽤나 많은 것들이 많이도 변한 척 하나도 변하지 않은채로 그를 맞아들였다. 결국 그는 돌아오자마자 피곤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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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서재보다는 창고로 쓰였던 방을 치운 뒤 컴퓨터를 옮겨놓고 이런저런 작업을 시작할 생각으로 책들을 정리하던 어느 일요일 오후, 어딘가에서 사진이 떨어졌다. 그러니까 이 사진은 첫 번째 장이었고, 처음부터 이렇게 사진이 희미했던 탓에 그는 카메라가 이상해서 그런 것이라고 판단하고 똑같은 사진을 한 장 더 찍었었다. 그러나 기억하기로 두 번째 사진 역시 별 차이가 없었다. 어째 이 사진과 관련된 기억은 처음부터 이렇게 바랜 느낌인것 같았다. 치우면 치울 수록 방은 깔끔해져만 갔지만 또 다르지만 똑같을 수 밖에 없는 월요일을 바로 코 앞에 둔 일요일 오후, 그가 짜증과 무력감의 정도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 by bluexmas | 2008/08/26 13:29 | — | 트랙백 | 덧글(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