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차네
어젯밤, 아니 사실은 오늘 새벽, 베게에 머리를 누이면서 시계를 보니 두 시 반… 그래도 여섯시에 눈이 진짜 번쩍 뜨였다. 알고 보면 눕자마자 바로 잠 든 것도 아닌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무거운 공기의 날씨가 사고귀신을 부추기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뜩이나 새학기 시작으로 붐비는 고속도로에 사고가 네 건이나 널려 있었다. 한 건만으로도 금상첨환데, 참 비단실에 눈이 부셔서 나도 사고를 낼 것 같은… 마지막 사고는 뒤를 받힌 차가 완전히 360도 돌아서 차 진행 반대방향으로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오래된, 그래서 낡은 소형차에 장정 다섯 명이 탔는데 다행스럽게도 하나도 한 죽은 듯…
차가 막혀 출근길이 길어지면 휴계소처럼 들르는 커피가게에서 커피를 산다. 그냥 커피가 아니고 ‘Shot in the Dark’ 라고, 커피에 에스프레소 샷을 섞은 커피다. 말하면 커피의 폭탄주, 그래서 폭탄 커피? 하여간 그걸로도 모자랄 것 같아서 옆의 수퍼마켓에서 늘 먹는 바나나와 일 때문에 지치면 마시는 당근주스, 그리고 Red Bull을 산다. 레드 불은 사실 완전히 박카스다. 카페인에 타우린, 온갖 불량한 화학물질을 첨가하여 잠을 못자게 만드는 해로운 음료순데 오늘은 여기에라도 기대기로 마음을 먹는다. 꼭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기분이다, 라는 표현을 쓰려고 했더니 아직도 다 팔지 못하고 남은 영혼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고백하건데 옛날옛적에, 그냥 건축 안에 남아서 일만 할 수 있으면 제 영혼일랑은 낼름 가져가셔도 좋아요, 라고 악마에게 애원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니 일단 오늘은 더 팔지 않기로 한다. 판다고 했다가 물건이 없으면 다음을 위한 할인 쿠폰이라도 끊어줘야 할 것 같거든.
계속해서 일은 고되다. 거기에 처치곤란한 과대망상 왕자님이 합류하셔서 괴로움을 겪는 사람이 많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도, 얼굴이 잘 생긴 사람도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너무 무지하거나 자신을 속이는데 능해서 자신이 일으킨 문제나 자신의 무능력함으로 고민을 안 하는 사람이다. 이거, 농담이 아니다. 나는 언제나 이런 문제로 미친 듯이 건강에 신경써도 주어진 명줄대로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늘 하니까. 가끔은 아주 작은 실수에 잠이 안 오는 날이 있으니까. 지난 번에 주차대수 산정 잘못하고는 정말 오랫만에 나 자신을 실컷 미워했었다.
일이 고되어도 야근은 가급적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 나니 일곱시였다.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고 회사 근처 공원으로 달리기를 하러 간다. 세 시간 반 자고, 야근하고, 달리기도 한다. 이건 다 11월의 반쪽 마라톤을 위한 준비다. 거리를 이번 주부터 5마일로 올렸다. 평일에 세 번 5마일, 그리고 희망사항이지만 주말에 하루 6.2마일, 그러니까 10킬로미터. 다행스럽게도 날씨는 요즘 달리기 하기 너무 좋다. 막판에 좀 힘들었지만 달리기를 마치고 다시 회사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으러 간다. 사실 어제 두 시 반에나 잘 수 있었던 이유는, 내일의 자원봉사 때문이었다. 작년에도 했던, 아픈 어린애들과 그 가족들이 묵는 집에 음식을 준비해주는 자원봉사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만들기로 사람을 돕는다는데 내가 마다할리가 있나- 작년에 내가 속했던 팀이 돌아가는 꼬라지가 너무 마음에 안 들어 이번엔 내가 직접 모든 걸 맡아서 진행한다. 언제나처럼 나는 디저트를 준비하고 나머지 애들은 재료를 사가지고 자원봉사 장소로 오면 음식을 만드는 거다. 처음 계획은 오늘 그냥 만드는 것이었지만, 그젠가 날아온 스팸메일을 뒤져보니 Extreme이 오늘 공연을 한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걔네들이 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겠지만,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제일 잘 나가던 밴드들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그때 기타치던 애들치고 익스트림 노래 한 번 따라 안 쳐본 사람이 없을텐데, 나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지만, 귀찮아서 곧 그만뒀다. 핑게인즉슨 내 기타는 반음 낮추기가 귀찮아서, 라고…
하여간 오늘 공연을 보면 시간이 없을까봐서 어제 뭔가를 만들다보니 두 시 반이었고, 세 시간 반 자고 출근해서 커피와 당근주스, 레드 불을 차례로 목구멍에 쏟아부어가며 열 시간 넘게 일하고 달리기 5마일 하고 또 공연을 보러 갔다. 이렇게 살아도 돼? 라는 생각을 잠깐 했으나, 솔직히 나는 이런 날이 더 좋다. 남은 삶에 비례해서 오늘 남은 만큼 나를 죽이지 않으면 가끔은 사는 것 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살면 정말 살고 있는 것 같다. 후회가 없어진다.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고등학교 때 생각이 참 많이 났다. 그때는 일주일에 하나씩 카세트 테이프 사는 낙으로 살았다. 돌아보면 토요일에도 수업이 있었으니 당연히 학교에 갔고, 일요일에도 자율학습을 하러 학교에 가서는 오후에 꼭 수원 시내로 나가 테이프를 사가지고 집에 돌아왔었다. 그래서 모았던 테입이 300여개 되었던가… 부모님이 오산으로 이사하시면서 짐을 줄이시느라고 그 테이프를 전부 싸서 나에게 배편으로 보내주셨다. 그래서 그냥 그 때 생각을 많이 했다.
공연을 다 보고 집을 돌아오는 길, 바람이 제법 서늘했다.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약간 한기를 느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그냥 나도 모르게 입에서 바람이 차네, 라는 말이 감탄사처럼 흘러나왔다. 사실 그건 행복하다, 또는 곧 행복해질거다, 와 비슷한 의미일 것이다. 너무나도 더운 이곳의 여름, 그 기나긴 여름 내내 가져보지 못했던, 자연의 섭리에 의해 유보되었던 행복이 곧 찾아올 것 같은 느낌, 바람이 이렇게 차지면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아직 적어도 한달은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나에게 올해의, 지금의 한달은 단지 이 주일에 불과하다. 나는 곧 또 자리를 비울거니까.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그 기나긴 고속도로를 타고 오면서, 질릴세라 바람이 차네, 라는 말을 입에 담고 또 담았다. 마치 그것만이 나에게 허락된 초라한 행복의 표현인 것처럼. 아니,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사실… 이라고 설명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내 옆자리에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다. 대신 나는 막 내가 타고 있는 차선에 자리를 잡은 뒷차에 손을 흔들었다. 내 손에서 후광이 드리운 예수님의 그것처럼 빛이 나더라도 그/그녀는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손을 움직였을 때 일렁였던 공기의 움직임이 태풍만큼 강해도 그/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나는 손을 흔들었다. 어디까지 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멀고 먼 길일테니 조심해서 가세요, 바람이 많이 차졌으니 걱정일랑은 이젠 붙들어 매셔도 좋을 것 같거든요. 게다가 가는 곳이 북쪽이라면.
# by bluexmas | 2008/08/14 14:41 | Life | 트랙백 | 덧글(8)
그 밖에 박카스+레모나라든가 박카스+포카리 스웨트도 꽤 유행했고…아아, 왠지 이렇게 쓰다 보니 저도 막장 인생을 살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암튼 정말 살고 있는 것같이 느끼는 건 좋은 것 같아요. 이것도 역시 부럽습니다.
비공개 덧글입니다.
shin님: 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새 앨범도 나왔던데요? 그저껜가… 공연장에서 $10에 샀는데 좋더라구요. 사셔도 될 것 같아요. 데드라인이라니 학교에 다니시나요? 전 아직도 카페인에 굉장히 민감하더라구요. 몰랐는데.
산만님: 저 싸이 월드에 글이 600개 있나? 지금은 닫았어요. 지금 읽어보면 참 어이 없는 글들이 많더라구요. 백업해야되는데…
비공개님: 저도 대학교정은 참 좋아했는데, 언제나 저라는 사람이 그러하듯 소통의 기억은 별로 없어요. 전 아웃사이더였죠. 그냥 백화점이나 서점에 가거나 혼자 길거리를 싸돌아 다니는 맛에 살았거든요. 알고보면 우리는 다 먼지처럼 구르는거죠 뭐. 사실 공부는 우아한 직업이 아니에요. 육체적으로도 힘들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