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달만에 지키는 약속
1. 지난 겨울, 북해도에 갈때 그림엽서를 사다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있었다. 그림엽서 한 장 쯤이야. 그럼요, 라고 시원하게 대답하고(지금 기억하기로는-) 여행의 3일째인가 하코다테에 가서 사진의 그림엽서를 샀다. 삿포로에서 기차로 세 시간을 가는 하코다테에서는 바다에서 나는 소리가 가장 기억에 선했다. 저 엽서를 산 전망대에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 바다를 굽어보면 배소리인지 바람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구오오-와 같은 무겁고 느릿하게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바람은 차가왔다. 약간 시간을 들여 엽서를 고르고 토미 리 존스가 선전하는 보스 캔커피가 자판기에 종류별로 있었는데 그 가운데 노란 캔인가를 마시고 다시 내려왔다. 이렇게 산 엽서인데 막상 서울로 돌아가서는 찾지를 못해서 부탁한 사람에게 줄 수가 없었다. 그림엽서 안 사왔냐고 물어봤는데 샀는데 못 찾았어요- 라고 말하면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아서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주엔가 아주 우연하게 찾아냈다. 너무 오래 되어서 새삼스럽다. 드라마를 찍으려고 묵혀둔 엽서도 아닌데 사는게 이렇다보니 가끔 본의 아니게 싸구려 드라마를 찍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것도 요즘은 생각보다 아주 자주.
2. 전망대가 있는 산에서 내려와서는 역 앞의 시장에서 오징어회를 밥과 함께 먹고 다시 기차 세 시간을 타고 돌아왔다. 복도 맞은편의 자리에는 정말 딱 일본사람처럼 생긴 안경 쓰고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있었는데, 그 세 시간 동안 계속해서 세로줄로 일본어가 쓰인 문고판을 읽으면서 맥주를 마셔대서 삿포로에 도착할 때쯤에는 얼굴이 완전히 벌개져 있었다. 어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추운 날씨에 화장실 무지하게 많이 갔겠다, 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는 역 상가에서 부모님 드릴 과자랑 이것저것을 샀었나? 저녁엔 털게를 먹었는데 별로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억지로 라디오 탑인가에 올라갔나보다. 하여간 기껏 3박 4일 밖에 머무르지 않았고 눈도 쌓여있는 것 말고는 별로 오지 않았지만, 이렇게 더운 여름날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으면 여행의 기억이 계속해서 난다. 아주 엉뚱한 순간-오늘 그려야 할 도면에 대해서 얘기를 나눌때라던가 누군가와 주말에 뭘 했나에 대한 수다를 떨때-에 아주 살짝 스치듯이, 마음을 베고 지나가는 아주 차가운 칼날 뭐 이런 비슷한 느낌으로(어째 말로 설명이 안 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나는 아무도 모르게 몸을 떤다, 또 가고 싶다.
# by bluexmas | 2008/08/05 13:29 | Life | 트랙백 | 덧글(4)
그나저나 2번, 저도 가끔 겪어봤어요. 하루키의 소설에 나왔던 말처럼, 과거의 즐거웠던 추억 덕분에 현재의 삶을 지탱하고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
비공개 덧글입니다.
이른 새벽 시간 하코다테에 내렸는데, 역 근처에 있는 새벽 시장에서 해산물 덮밥으로 아침을 먹고 호텔에 짐을 가져다 둔 다음 전차를 타고 목욕하러 갔었어요. 온천은 아니고 그냥 동네 목욕탕이었지만…이렇게 쓰고 보니 꽤 재미있는 여행이었네요.
비공개님: 그러나 사람이 머물 곳이 없으면 마음이 항상 그렇더라구요. 돌아오는 비행기라는 건 언제나 좀 그렇죠?^^
turtle님: 저도 기차타고 북해도를 좀 더 돌아다니는 여행을 하고 싶어요. 열차 이름마저 북극성호라니 은하철도 999생각이 나는 것은 왜일까요. 저는 그 시장에서 숯불에 구운 가리비 조개를 먹었는데, 해산물 덮밥은 어떤 맛이었을까 궁금하네요. 그 시장 해산물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