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Here
점심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일이 떨어졌다. 두바이 지사와 다른 컨설턴트들한테 보내는 건데 처음엔 내일 보낼 생각이라고 했다. 하지만 속도를 좀 붙여서 하다보니 잘만하면 오늘 보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웬만큼 한 다음에 좀 늦게까지 하더라도 오늘 보내자고 내가 우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일곱시가 거의 다 되었는데 출력을 해서 보여주니 J는 또 이것저것 고치기 시작한다. 고쳐주는 걸 얼핏 보니 적어도 한 시간은 걸릴 것 같았다. 그럼 내일 하는 수 밖에, 라고 생각하고 고쳐서 주는 걸 받으면서 내일 마저 하겠다고 얘기를 했다. 그러려무나, 라는 답을 듣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는데 J가 다시 다가오더니 하던거 그냥 내가 마저 끝내서 오늘 보내는게 낫겠다, 어떤 파일 쓰면 되지? 라고 묻는다. 이봐, 그럴꺼면 나보고 그냥 오늘 보낼테니 끝내라고 하던지… 나는 잠시 당황스러워졌다. 처음엔 내가 우겨서라도 오늘 끝낼 생각이었는데 눈치를 보니 내일까지 할 것 같아서 접는데 가는 사람 등 뒤에서 자기가 마저 끝내고 보내겠다고 말하면 나는 뭐가 되는…물론 나도 오늘은 지쳐서 더 하고 싶지 않지만, 오늘 끝내고 보낸다고 처음부터 얘기를 했으면 어떻게든 남아서 끝냈을 것을. J는 원래 그런 스타일이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지만 그것에 상관없이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아진다. 이건 내 일이니까 내 손으로 끝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꼭 내가 오늘까지 끝내기 싫어서 상황이 이렇게 된 것 같은 느낌이 싫다. 그래서 J에게 얘기한다, 오늘 보낼거면 내 손으로 끝낸다고. 그러나 J는 너 늦게까지 남아있는게 싫으니까 그냥 가도 된다고 대답한다. 거기까지 말했는데 더는 할 말이 없어진다. 짐을 챙긴다. 하루 종일 나름 일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마무리가 이런 식이면 하루 전체를 망친 것 같은 기분이 들때가 있다, 싫다. 이런 상황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이런 기분을 느끼는게 싫다. 이럴때 나는 내 성격을 탓하게 된다. 정말 내 성격이랑 사람 많은 회사랑 너무 안 맞는다, 안 맞아. 무슨 주문처럼 혼자 계속해서 중얼거리면서 건물을 빠져나온다. 시간은 일곱시, 코스트코가 문 닫기 전에 들러야 되고 또 다른 수퍼마켓에도 들러야한다. 요즘 계속 토요일에 장을 봤는데 그러다보니 주말에 너무 시간이 없어진다는 걸 알았다. 이번 주말에는 때려 죽인대도 집에 꼼짝않고 틀어박혀서 청소를 해야된다. 벌써 8월인데 시간이 너무 없다. 오늘 꼭 장을 다 봐야만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이 뻐근하다. 아무래도 다음주에는 병원을 가봐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코스트코부터 들러 장을 본다. 다른 때보다 오늘은 장보는게 조금 더 일 같다, 즐거움이 아니고. 그래도 미리 필요한 걸 다 적어두어서 시간은 그렇게 많이 걸리지 않았다. 호밀가루를 사러 들른 세 번째 수퍼마켓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얼마만이야… 밀가루가 진열되어 있는 복도에서 밀가루 4킬로그램이 든 종이봉투를 오른손으로 들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채로 노래를 듣는다. Step out the front door like a ghost into the fog, where no one notices the contrast of white on white. 왼손으로는 오른팔을 붙들고 한참을 그렇게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오늘은 침대밑으로 몸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잘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 by bluexmas | 2008/08/01 12:38 | Life | 트랙백 | 덧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