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만은 집에서
그저께는 야근을 대비해서 저녁거리를 미리 챙겨갔지만 막상 때가 되자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원래 뭔가 뱃속에 별로 넣고 살지 않아서 그때쯤 되면 마우스-고양이의 앙숙이든 컴퓨터에 딸린 놈이든-를 뜯어먹고 싶을 정도로 배가 고팠지만 그래도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결국 쫄쫄 굶다가 일하고, 뭔가 살게 있어서 어딘가 잠깐 들르기까지 하고서는 열 시 다 되어서 저녁을 먹었다.
이걸 습관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궁상이라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저녁만은 집에서 먹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강박관념처럼 지니고 산다. 이를테면 하루 한 끼라도 좀 편한 몸과 마음으로 먹겠다는 생각정도라면 스스로 이해하기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데, 문제는 집에서 밥을 먹어도 결국은 혼자 먹는 건데 왜 굳이 집에서 먹으려냐는 것… 이렇게 생각하면 뭔가 궁상스럽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인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언젠가는 점심에 집착을 가졌던 적도 있었다. 군에 가기 전까지 절반의 대학생활동안 나는 기회만 닿으면 굳이 왕십리에서 수원의 집까지 꾸역꾸역 내려와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런 경향이 군대를 가기 직전의 마지막 학기엔 약간 심해져서, 오후 수업이 별 볼일 없다 싶으면 그냥 제끼고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차려 먹고는 거실의 오디오에 틴에이지 팬클럽을 틀어 놓고 누워있다가 잠들곤 했다. 가족들이 집에 돌아올 때까지. 그러니까 이것도 웃겼던게, 점심을 먹기 위해 집에 돌아온다고 집에서 누군가 기다렸다가 밥을 차려준다거나 같이 먹거나 하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꾸역꾸역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나 혼자 점심을 차려 먹으려고. 어머니는 내가 군에 가서야 학원을 접으셨으니, 아주 어렸을때에도 나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가 식탁에 차려놓고 간 반찬으로 밥을 차려 먹는 아이였고 당연히 집에 누군가 있었던 적이 드물었다. 나랑 이름 두 자를 공유하는 그 분은 먹은 그릇을 설겆이 하지 않는 경향이 다분했으므로 때로는 없으니만 못했고(일하는 엄마와 설겆이 안 된 그릇은 같은 하늘, 아니 적어도 가정 아래 공존할 수 없다는 것, 어머니가 일하신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알 듯).
그렇다면 나의 이런 궁상은 대체 어디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을까, 주린 배를 움켜쥐고 주말에 해 놓은 카레와 밥을 데워서 허겁지겁 먹으며 생각했다. 밥을 먹을 때는 항상 텔레비젼을 본다. 누군가는 그러면 음식의 맛을 잘 못느끼기도 하고, 더 많이 먹을 수도 있으니 텔레비젼을 안 보는게 좋지 않냐고 말하지만, 밥을 먹는데 내 음식 먹는 소리만 공기를 채우면 그게 더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다음부터는 항상 텔레비젼을 틓어놓는다. 그렇게 밥을 먹고 앉아있노라니 그 뿌리를 찾을 수 없는 궁상이 만족되면서 찾아오는 행복함이 포만감과 손잡고 의식의 강 너머에서 철벅철벅 사이좋게 걸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에 나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이것도 행복이라면 감지덕지 반겨주지!’ 라는 궁상스런 대사와 함께 그 둘을 한 팔에 하나씩 안았다. 마치 이라크 파견 나갔다 와서 지난 일 년간 보지 못했던 이란성 쌍동이 딸내미들을 품에 안는 존슨상사라도 된 것처럼.
# by bluexmas | 2008/07/25 12:59 | Life | 트랙백 | 덧글(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