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하루

오전 07:00: 뭔 꿈을 꾸었는지 눈을 떴다. 최근에 여덟시 이전에 눈을 뜬 적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침은 회사에서 먹기로 하고 주말에 엉성하게 부친 팬케잌을 챙기고 커피를 내린 뒤 차에 몸을 실으니 일곱시 사십 오분.

오전 08:40: 회사 도착, 빌어먹을 렌트카가 운전하고 있는 사람을 폐소 공포증에 몰아넣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차 만세. 니들이 정말 차를 발명한 애들 맞니? 이건 자동차가 아니야… 그러니까 빌려주는 것 말고는 아무도 안 타지, 창피하지 않니? 나라면 그럴 것 같아.

오후 12:00: 점심때까지 계속 똑같은 일을 하다가 구토증상을 느끼며 점심 식사 시작, 연어에 볶은 시금치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짝이라는 교훈을 얻다. 무엇보다도 시금치의 3/4 가 수분이라는 사실이 문제.

오후 01:00: 바나나와 저녁에 먹을지도 모르는 칠면조 햄을 사들고 사무실로 돌아오다. 땀을 옷이 젖을 만큼 흘렸다. 그러나 나온 배는들어가지 않는다. 30대니까, 중반이니까.

오후 03:30: 네 시 반 전에는 하지 않는 산책을 앞당겨 하다. 지금 하고 있는 반복적인 일에 구토를 느끼고 있다는 반증, 우웩.

오후 05:15: 배가 고파서 간식 대신 저녁을 먹다. 주말에 엉성하게 부친 팬케잌과 점심에 사온 칠면조 햄, 전자렌지에 데친 브로컬리, 그리고 복숭아 한 개.

오후 07:00: 팀 리더 제이와 나는 주차의 신이 되었음을 자축했다. 그의 관리하에 나는 누군가 싸 놓은 주차의 똥을 지난 일주일도 넘게 치워댔다. 그 똥을 싼 인간이 동족임을, 그리고 나에게 수없이 자기가 얼마나 본받을만한 인간임을 부르짖어댔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나는 분노에 잠을 이루지 못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나는 벌써 오래 전에 정상인간이 아닌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던가… 어느 누구도 나에게 정상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을. 그리하여 분노를 삭히고 내일 일거리를 위한 준비를 마치고 예상보다 일찍 퇴근했다. 일곱시 반… 자정쯤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후 08:30: 집도 절도 없는 홀몸이라면 운동말고 할 수 있는게 무엇이겠느뇨? 6 킬로미터 달리기를 30분만에 끝내다. 중간에 끼어드는 다른 사람들을 가상의 경쟁상대로 생각하며 무리해서 결국 기록은 별로였다. 나는 10월 초까지 200마일을 달려야 한다. 누군가 ‘외롭지만 혼자 달릴 수 있어’ 라고 말했는데 그건 구라다. 혼자 뛰는 건 더럽게 외롭다.

오후 10:00: 오늘처럼 반복되는 일만 한 날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건 박카스를 배신하는 행위다. 단골 가게에 들러 맨날 마시는 걸 집어 들다가 권해달라고 부탁했다. 오늘은 바에 들르기 귀찮았다. 권해준 포도주는, 나쁘지 않았다. 아무렴, 전문간데… 전문가에게 물어보는 것 중 가장 즐거운게 술에 관해 물어보는 것이다. 대답해주는 그들도 거의 언제나 즐거워보인다. 주말에 갈비찜을 할 생각인데 진판델 한 병을 집어올 걸, 후회하기 시작했다.

오전 12:00: 나를 항상 낯 간지럽게도 ‘sweetie’ 라 불러주는 고마운 사무실의 매니저 D의 생일이 내일이라는 걸 알아서 부엌에서 난리를 치고 있다. 요즘같은 상황이라면 집에 돌아와서 나를 위한 저녁 차려 먹기도 귀찮은게 현실이지만, 그래도 나를 움직이게 만다는 힘이 있다. 무슨 일을 해도 상관없다, 가끔은 내 자신이 그 어떤 이익을 위해서보다 아주 작은, 그리고 순수한 동기를 충족시키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싶으니까. 본의 아니게 나의 세상을 잠식한 어둠의 존재-일- 의 바깥에 자리 잡은 그 어떤 것이라도. 바쁘게 부엌일을 하면서 시규어 로스의 디비디를 또 돌려본다. 부엌일과 시규어 로스, 왠지 공명과는 거리가 멀어보이지만 아무렴 어떨라고… 몇 주전에는 김치를 담그면서도 봤는데. 김치와 시규어 로스, 참 잘도 공명하겠다. 참고로 김치는 실패작이었다. 포기김치는 정말 열 번 담궈봐야 한 번 성공하기도 어렵다.

하여간, 오늘은 직장인의 기준으로 봐서 자주 찾아오지 않는 완벽한 하루였다. 지각하지 않고 출근해서 일은 티날만큼 적당히 많았으며 먹어본 적 없는 포도주는 마실만 했고, 집에 와서도 대책없이 소파에 누워 있는 것보다는 뭔가 의미있는 일을 했으니까. 달콤한 바닐라 향과 시규어 로스의 노래가 나의 공기를 채운다. 오늘은 더 필요한게 없다, 이만하면 행복하다고, 옆에 아무도 없어도.

 by bluexmas | 2008/07/24 14:20 | Life | 트랙백 | 덧글(8)

 Commented at 2008/07/24 22:2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보리 at 2008/07/25 00:19 

“그러나 나온 배는들어가지 않는다. 30대니까, 중반이니까.”

어우.. 눈물이 앞을… ㅠ.ㅜ

 Commented by basic at 2008/07/25 01:47 

저도 눈물이…ㅠㅠ;;;; 숨을 참고 있어도 배가 그대로 나와있다는.;;;

 Commented at 2008/07/25 06:0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1984 at 2008/07/25 08:43 

직장일은 겪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부러운 하루인데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7/25 13:10 

비공개 1님: 그러셨군요. 무슨 일을 하시는지 기억이 약간 희미한데, 많이 바쁘신봐요. 무엇보다 건강 잘 지키세요. 그렇게 바쁘고 피곤한때는 씹어먹는 비타민 씨와 멀티비타민, 뭐 이런 것들이 도움이 좀 될거에요.

보리님: 눈물도 나온 배에 떨어지느라 땅을 못 밟는다는거, 아시잖아요 T_T

basic님: 아직 꽃다운 20대로 알고 있었는데요! 뭐 배를 걱정하신다고…

비공개 2님: 당연히 알려드릴 수 있죠! 언제나 모든 정보는 개별 통지된답니다.

1984님: 당연히 생년>조지 오웰이시겠죠…? 남들이 부러워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하루인데 직장생활이 가운데 버티고 서서 모든 걸 망친다는 그 전형적인 월급쟁이의 하루죠. 처음 뵙는 것 같은데 반갑고 종종 들러주세요^^

 Commented by blackout at 2008/07/25 16:13 

“옆에 아무도 없어도.” 가 좀 뜨끔하네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7/27 15:26 

blackout님: C’est la v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