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만의 헌혈

마지막으로 헌혈을 했던게 1996년 이맘때였으니 꼭 12년 만이었다. 그때 나는 군에 있었고 자대배치를 받은지 두 달이 될까말까했던 이등병이었다. 사실 군에서 두어번 해본 적이 헌혈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전에는 해보지 않았으니까. 자대에서 헌혈을 했었는데 중대장인가 누군가의 친척이 아파서 헌혈증이 필요하다고 헌혈이 끝나자 마자 헌혈증도 거둬가버렸다. 사실 우리나라 혈액 공급원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이 군인데(막말로 얘기해서 국방을 위해 의무적으로 소집하고 피도 정기적으로 꼭꼭 뽑아간다는 얘기지, 짬밥 먹여가면서…몸빨리고 피빨리는 현실이라고나 할까), 내가 복무할 때쯤 말라리아가 퍼져서 전방에서 피를 못 뽑게 한 다음에는 막말로 피가 모자란다고 들었다.

미국에 와서 살면서 헌혈할까 생각을 안 했었던 건 아니었는데 내가 대체 누구를 도와주는 건지 몰라서 안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 도와주기 싫다는 마음도 사실 있었다. 그러나 뭐 언제까지 그런 생각으로만 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나에게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슨 강박관념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몰라도 뭔가 일이 잘 안 풀리고 답답하다는 기분이 들면 무엇보다 내가 덕이 부족한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되고, 그런 생각에 이르다 보면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뭔가 이런 쪽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예전에 짜증나는 일이 많았을 때 자원봉사를 나갔던 것처럼… 마침 적십자에서 사무실이 있는 건물로 사람들을 보내 피를 걷는다고 해서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에게도 피가 필요할 뻔한 기회가 있었으니 9년 전 치른 수술이 처음 계획보다 두 배로 큰 판이 되는 바람에 오랜 기간에 걸친 자가 헌혈이 필요했었을지도 모르는데, 준비를 못 했으니 그냥 수술했고 뭐 여태까지 잘 살아있다. 생각보다 피도 별로 안 흘렸다고.

사실 결과는 참으로 훌륭하지만 헌혈이라는 것의 과정은 그렇게 유쾌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는 하고 있다. 몸에 바늘을 꽂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자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어딘가에 담기는 걸 보면 기분이 참으로 묘해지니까. 저 피, 따뜻할까? 라는 궁금증이 생겨 피가 담기는 주머니에 손을 대어보려다가 참는다. 알고보면 나도 그렇게 냉혈은 아니니까 적당히 따뜻하겠지 뭐.

피를 다 뽑고 주스와 과자가 준비되어 있는 방에 들어갔는데 주스며 과자 모두가 High Fructose Corn Syrup이 든 종류여서 먹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건강에 보탬이 되기 위해 피를 뽑고 나서 먹으라고 준비한 음식이 이런 것이라니 참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었지만, 이게 바로 미국이라는 나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왼팔에서 피를 뽑는데 나는 왜 오른팔에서 뽑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뭐 물어보기도 귀찮고 해서 그냥 사무실로 돌아왔다.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이 좀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뭐 예수님은 몸도 받아 먹고 피도 받아 마시라고 하셨는데 내 피는 사실 마시기는 좀 어려우니 뭐 누군가의 몸에 다시 자리잡아 삶에 보탬이 된다면 나에게도 나름 보람이겠지. 단, 나눠준 사람이 까칠해서 받은 사람도 까칠해질 것 같다는 게 좀…

 by bluexmas | 2008/07/16 13:10 | Life | 트랙백 | 덧글(11)

 Commented by Eiren at 2008/07/16 13:30 

콘 시럽이 들어간 음식을 안 드시는 군요. 지인의 지인이 옥수수 알러지가 있어서 그 뒤로 살펴보게 됬는데 안 들어간 음식 찾아보기가 힘들더라고요. 오른팔에서 뽑은 건 혈관이 더 잘 보여서가 아닐까요^^?

 Commented by 그대로두기 at 2008/07/16 15:25 

알고 보면 나도 그렇게 냉혈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잘 모르는 사이엔 좀 냉혈한처럼 보이기도 하는군요. ㅎㅎ

이거 셀카겠지요? 그걸 의식하니 자꾸 웃음이 납니다. ‘그 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는, 책 제목도 생각이 나고.

 Commented by 산만 at 2008/07/16 15:32 

전 대보았습니다..궁금해서. ^^; 나름 비닐백이 두꺼워서, 아주 따뜻하진 않고 미적지근하더군요. (냉혈일수도) 전 혈압이 낮아서인지 암튼 피가 잘 안나와서 손가락 끝을 찔러 피검사 할때도 손바닥부터 간호사가 쥐어짜고, 양을 채우는데도 남들보다 훨씬 오래걸려서 그뒤로 안하는 것에 대한 핑계로 삼고 있어요.

누군지 끝까지모를 어떤이와 좋은 일로 “진하게” 연결된다는게. 정체된 기운과 마음의 피로를 덜어줄 수 있으면 좋겠군요.

 Commented by 은사자 at 2008/07/16 22:13 

그쵸. 외국에 나와서 살게 되면 내가 대체 누구를 도와주는 건가.하는 그런 마음 들때가 있어요. 특히 호텔에서 일했을 때 회사에서 소비자에게 불공정한 가격을 책정한다거나 하는 걸 보게 되면 한국이었으면 항의를 하거나 시정을 요구했을텐데, 상사에게 한 마디해보고 안되면 “그래, 안 고치면 너네 중국 사람들끼리 불편한거지, 내가 불편한가.” 뭐 이렇게 생각하며 그냥 넘어가고 무심하게 살게 되더라구요.

블루님 좋은 일 하셨네요~

저도 멋있게 배포크게 global citizenship을 구현하면서 살고 싶어요 T.T

 Commented by blackout at 2008/07/17 05:27 

저도 운전면허증에 장기기증할래? 라는 질문에 자신있게 No라고 대답했어요…^^ (사실 장기기증에는 호감을 갖고 있지만, 도대체 누구한테 좋은일? 그런생각때문에…) 저는 주사바늘에 대한 반응(?)이 있어서, 주사 여러대 맞으면 혈관이 수축해서 머리가 어지러워지고…ㅠㅠ…한번은 예방주사 맞다가 쓰러질 뻔했다는…

 Commented by 도로시 at 2008/07/17 09:17  

와~ 정말 좋은 일 하셨군요. 짝짝짝!

전 피가 모자라 피부색이 노리짱한 사람이라 헌혈하면 안된다고 하더군요. ㅠ.ㅠ

헌혈하실 수 있는 건강한 분들 멋져요~

콘시럽.. 며칠 전 자몽주스사까, 크랜베리주스사까 하면서 식품첨가물 확인하는데 과당이니 시럽이니 그런 거 보니까 못사겠드라고요. 잘 모르는데도요. -_-

원기 회복하는 하루 되세요. ^^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7/18 13:30 

Eiren님: 그냥 콘 시럽이 아니고 high fructose corn syrup이에요. 이게 미국의 심각한 문젠데, 나중에 글 꼭 올려볼께요.

산만님: 저는 비위가 약해서 손은 대어보지 못했답니다. 여성분들의 경우 저혈압이 많다고 들었어요. 제가 헌혈할테니 산만님은 하지마세요^^ 사실 진하게 연결되는 건 그리 바라지 않는답니다. 소수를 빼놓고 늘어지는 인간관계는 별로라서요…

은사자님: 그러나 이젠 오래 ‘살아서’ 그런 마음 버리려고 시도한 헌혈이에요. 그러나 사실 저는 멋지고 배포 큰 사람은 아니랍니다. 가족들 사이에선 거의 쫌생이 막내에요…^^;;;

blacktout님: 저도 그랬는데 장기기증 이젠 하고 싶어요. 죽으면 끝이잖아요. 썩느니…

도로시님: 글을 곧 올려야겠어요. 미국에서 수입되는 주스 종류는 절대 사지 마세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7/20 16:12 

그대로두기님: 어째 기억이 안나서 찾아보니 그대로두기님 덧글에 제 덧글을 안 달았네요. 전 주로 냉혈한 또는 개싸가지로 인식되곤 한답니다, 주변에서요. 주로 싸가지 없는 인간으로 인식되는데 아주 특출난 재능을 지니고 있죠, 믿거나 말거나… 사진은 아이폰 카메라로 찍었어요. ‘카파의 손’은 어째 제목을 아주 많이 들어본 기억이 나네요. 읽은 것 같지는 않아요.

 Commented at 2008/08/18 16:3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8/08/18 16:3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8/19 12:59 

마우스를 왼손으로 쓰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저는 계산기를 쓸 일이 많은데, 왼손으로 수자판을 두드리면서 오른손으로 마우스질을 하거나 글씨를 쓸 수는 있어요. 군에 있을때 회계 비스무리한 걸 했거든요. 그때 연습을 했지요.

참, 아이폰 카메라로 찍은건데 아이폰의 카메라는 구리기로 정평이 나 있죠. 화질이 별로 안 좋고, 단초점일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