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중간은 개밥으로나

옛날에 알았던, 그러나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어떤 분께서는 ‘-없지 않아 있다’ 라는 표현을 잘 쓰셨더랬다. 고백하건데 그런 표현을 쓰는 사람을 처음, 그리고 사실은 거의 마지막으로 만났기 때문에 나는 당황했었다. 아니, 사실은 짜증이 났었다. 예를 들면 뭐 이런 표현 “걔는 당근을 잘 먹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어.” 그래서 있다는 걸까, 아니면 없다는 걸까? 경향 傾向 이라는 단어 자체가 무엇인가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황을 의미하는데(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그게 없지 않아 있다면 대체… 그러나 사실 내 속을 들여다보면, 짜증이 났던 이유는 그 표현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걸 빚어내는 사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없지 않아 있다’ 라는 말 속에는 언제나 회피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고 생각했으니까. 누군가가 ‘그래서 없던데’ 라고 따지면 ‘있다는 의미였는데’ 라고 둘러댈 수 있고, 또 ‘그래서 있던데’ 라고 따지면… 모든 사람이 다 쓰지는 않는, 그런 어중간한 표현, 회피하기에 편한 뭐 그런. 그러나 이제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사람. 볼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아예 없는’ 그런 사람, 안녕.

왜 뜬금없이 이런 생각을 했냐면, 오늘 나의 상황이 너무 어중간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일을 번갈아 가면 갑자기 어느 한 쪽에도 속하지 않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오는데, 오늘은 그게 좀 심했다. 일을 줄 사람이 예정에 없던 출장을 가서 나에게 일을 못 주게 되고, 다른 일을 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붙잡을 새도 없이 계속 회의… 그렇다고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라서 현장에 나가면 되는데 또 그렇다고 계속해서 거기에만 나갈 수도 없는 뭐 그런 상황. 그러나 어느 누구와도 얘기할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나는 참다 못해 짐을 챙겨서 현장에 나갔다. 사실은 오늘 너무 나가기 싫었다. 어제도 갔었고 내일, 모레도 가야만 되는 상황인데다가 어제, 오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오늘은 그냥 사무실에서 일하려고 했는데 떨어지는 일은 없었고 책상 앞에 앉아서 시간 때우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요즘 같은 때 놀면서 일하는 척 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하여간 그래서 억지로 현장에 나갔다. 오늘따라 의자들은 정말 최악이었다.

이것도 언제나 하는 얘기지만, 사는데는 어중간함이 끼어들 구석이 없다고 생각한다. 죽음과 같은 삶이나 삶과 같은 죽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그러나 어떤 경우 ‘죽음과 같은 삶’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살면 사는 것이고, 죽으면 그냥 죽는거다. 그래서 없지 않아 있는 뭐 그런 건 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나에게 좋고 싫은게 분명한 사람이라고 얘기해줬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게 긍정적인 의미에서 싹튼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은 없다. 아니, 만약 내가 좋은 것도 없고 싫은 것도 없는 뭐 그런 사람이라면 누군가 나를 싫어하기 훨씬 전에 내가 나를 싫어했을 것 같다. 걔가 당근을 잘 먹으면 잘 먹는다고 말하고, 안 먹으면 안 먹는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당근을 너무 좋아 죽겠다고 먹다보니 싫어져서 토하거나, 남이 먹다가 토한 당근을 먹어보니 너무 맛있다는 걸 알아서 계속 먹게 된 상황이라도 생기는 것처럼 당근을 잘 먹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고 얘기하지 말고, 그런 얘기들에 귀 기울이고 있기엔 삶이 너무 짧다. 그러나 더 웃겼던 건,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얘기에 귀 기울여 주기를 원하는 경항이 없지 않아 더 많이 있었다. 꽤나 힘들었다니까요… 생각해보니까 어젯밤에 자다말고 소리지른 것도 아마…

 by bluexmas | 2008/07/10 11:41 | Life | 트랙백 | 덧글(3)

 Commented by 그대로두기 at 2008/07/10 12:38 

ㅎㅎㅎ 이 글 은근 재미있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3=3=3

 Commented by zizi at 2008/07/10 14:12 

(이 상황에 말하기 좀 겁나긴 하지만)

…그 말, 저도 가끔 쓰기는 해요. 언제 썼는고 하니, 상대방을 살짝 약올릴려는 의도가 있을 때 사용했던 것 같아요 >ㅅ<;;;; (…)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7/11 12:55 

그대로두기님: 그렇데 도망가시면 비겁한 경향이 없지 않아 았으신거에요^^

zizi님: 잘 다녀오셨어요? 어딘가 갔다오신 것 같던데…^^

(저도 가끔 쓰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어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