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9
기억을 더듬어보면, 여섯 살 때였던 것 같다. 아버지가 아침 일찍 깨워서 달리기를 시켰던 것이… 계절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새벽 바람은 차가웠고, 달리기는 끝이 나지 않았으며, 그 달리기 끝에는 한자 또는 영어 공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서재 벽에는 언제나 작은 칠판이 걸려있었는데, 여덟살까지는 한자가, 그 이후로는 영어가 쓰이곤 했었다. 막 뛰기 직전에 그 추운 아침의 달리기가 문득 생각났다. 이십 하고도 몇 년이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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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아침, 새벽 네 시 사십 오 분에 눈을 떴다. 회사엔 거의 늘 지각하면서 이런 때에는 절대 늦게 일어나는 일이 없으니, 나는 대체 어떤 인간으로 나이를 먹고 있는지… 하여간 언제나처럼 아침을 먹고 미리 준비해놓은 운동복을 챙겨입고는 집을 나섰다. 지하철역 근처에 다다르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차를 대고 지하철을 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나처럼 배번을 달고 있는 사람들을 보자마자 아드레날린 분비 시작… 아, 남들 다 늦잠자는 휴일에 돈 내고 달리기 하려는 사람의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런 기분이랄까.
출발지점은 달리기로, 아니 지하철로 세 정거장 떨어진, 아틀란타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백화점들이 밀집한 buckhead지역. 벌써 길을 다 막아놓고 배번에 따라 사람들을 가르기 시작한다. 나는 지난 며칠간 완전 문맹이었는지,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7만번대 인줄 알았더니 9만번대라는…번호가 1번부터 99999번까지 있고 만 번씩 무리를 갈라놓았으니, 나는 완전 꼴찌무리인 것… 친구들한테 7만번대니까 같이 뛰자고 얘기했는데, 다들 내가 어디 갔는지 찾겠다 싶었다. 하여간 여섯시도 채 되기 전에 출발지점에 도착을 했는데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출발하게 된 시간은 거의 아홉시… 그동안 거의 내내 서 있었으니 본격적으로 달리자 마자 다리가 내 다리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으하, 이래서 10 킬로 미터 뛰기나 하겠어…? 라는 생각이 처음 5분간 들었다.
총 참가 인원 오만 오천명이 말해주듯, 아틀란타의 상징적인 주도로 Peachtree Street은 사람으로 꽉 찼는데, 걷는 사람은 중앙선으로부터 왼쪽, 뛰는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모이도록 규칙이 정해져있기는 했지만, 뛴다고 다 빨리 뛰는 것은 아니니 뛰는 내내 사람들을 헤치고 뛰기 바빴다. 개인적으로 정해놓은 목표는 55분이었는데 중반 이후로 경사길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2-3마일은 기본적인 페이스(6-7분/마일)로 뛰다가 절반 이후에 진행되는 약한 경사길에서 여유를 많이 두다가 마지막에서 미친 듯이 뛰어주는 것이 이 대단하지도 않은 10 킬로미터 달리기에의 개인적인 전략이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워낙 대단한 행사이기 때문에 달리는 내내 구경꾼들과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를 구경할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뛰는 내내 아무런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서 응원하고, 중간중간 있는 바나 음식점에서 저녁이면 연주하는 밴드들이 나와서 연주하고…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나랑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게 나는 운동할때마다 듣던 음악을 들으면서 뛰었기 때문이다.
막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오랫동안 서 있었던 탓에 피곤함을 느꼈지만, 뭐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나… 시계를 보면서 페이스를 적절히 조절하니 절반을 뛰었을때의 시간이 24분… 그 이후 펼쳐지는 경사길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고 평소보다 천천히 달리다가 마지막 1마일째에서 언제나처럼 미친듯이 뛰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승점에서의 기록은 53분 29초…약간 과장을 보태자면 주변 어디에도 나와 같은 9만번 대의 사람이 없었다.
사실 실내에서 10 킬로미터 정도 뛰는 건 그리 어려운게 아닌데, 벌써 해가 떠 기온이 화씨 80도에 습도가 75 퍼센트인 환경에서 뛰는 것은 나름 힘들었다. 게다가 그 정도면 처치하지 않고도 뛸 수 있을거라 생각해서 놓아두었던 왼쪽 발바닥의 물집도 은근히 불편했고…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뛰는 사람의 속도를 늦추거나 아예 걷도록 만들지 않았으니, 나는 비교적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달리기를 마칠 수 있었다.
결승점을 넘어서서는 달리기를 마쳐야만 받을 수 있다는 티셔츠를 받고, 달린 길을 되짚어 회사로 돌아와서는 샤워를 하고 전날 가져다 놓은 옷으로 갈아입고는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다. 땀이 많이 날테니 샤워를 하고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지하철에는 달리기를 마친 그대로 지하철을 탄 사람들로 서울에서의 출근시간처럼 꽉 차있어서 과연 나 혼자 샤워하는게 무슨 소용이 있기는 한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평상시에 10 킬로미터를 뛴 것보다는 조금 더 피곤했지만, 계획했던대로 가게에 들러 김칫거리를 사가지고는 집에 돌아와서 절뚝거리며 배추를 절이고는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내일부터는 반쪽 마라톤에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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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어제 입었던 운동복을 빨기 전에 번호표를 떼는데, 뒷면에 적어놓았던 인적사항에 땀에 지워진 것을 발견했다. 배번의 뒷면에는 달리는 사람의 연락처와 비상시 연락처를 적게 되어 있었는데, 언제나처럼 비상시 연락처에는 N/A (Not Available) 을 적고 말았다. 10km 달리다가 죽을 것 같으면 죽는거고, 아니면 괜히 잘 모르는 사람들한테 누를 끼칠 필요가 없는거지…라는게 나의 평소 생각, 그러나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왔으니 된 것 아닐까.
# by bluexmas | 2008/07/06 10:46 | Life | 트랙백 | 덧글(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