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10K

비만아동이었던 내가 어렸을때 가장 싫어했던 학교 행사는 당연히 운동회였다. 뭐 단체로 하는 태권도 시범이니 애새끼들로 탑쌓기-나야 늘 맨 바닥의 맨 가장자리 받침돌이었다-니 뭐 이런 것들이야 어떻게든 할 수 있었지만, 개인경기인 달리기는 언제나 악몽이었다. 그래도 꼴찌는 안 해서 6등이나 7등으로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 민망한 건 아니었다. 공부를 잘해서 받는 우리말사전이며 한영사전이 운동회에서 달리기 잘 해서 받는 연필이며 공책보다 훨씬 좋았지만, 정말 달리기 잘 해서 연필 한 자루라도 받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날은 내가 학교를 떠나는 그날까지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저조했던 달리기의 개인사에서 단 한 번 입상권에 들만한 기회가 있었는데 그건 초등학교 4학년으로 기억되는 운동회의 장애물달리기였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주요 장애물로 그물이 있었고 또 거의 마지막에 사다리가 있는 달리기였는데 정강이를 완전히 모래에 갈아가면서 그물을 미친듯이 빠져나오고 보니 내가 2등인가 3등이었고 그 다음은 저만치 뒤떨어져 있었다. 몸 어딘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비만아동에게도 아드레날린이!)을 연료삼아 나는 종마-에이 설마…-처럼 질주했다. 잘 들리지 않았지만 어디에선가 저기 뚱뚱한 애 좀 봐! 라는 외침이 들려오는 듯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달리고 달려 거의 마지막 장애물인 사다리에 도달, 몸을 던져 넣으며 빠져나올때도 던져 넣을때와 같은 속도로 빠져 나오면 적어도 끝에 빨간 지우개가 달린 육각연필 한 자루 정도는 받아다가 집에 고이 모시고 가서 트로피를 넣는 유리상자에 넣어 가보로 모실 수 있었을텐데, 어찌된 일인지 나의 하반신은 사다리에서 그렇게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나를 따라잡은 아이들은 하나, 둘씩 사다리를 빠져나갔고 나는 결국 또 한 번 6등, 또는 7등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뛰었다, 언제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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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 규모의 행사성 경주로는 세계 최고 규모라고 들은 것 같은 Peachtree Road Race는 내가 사는 동네 아틀란타에서 매년 독립기념일 아침에 열리는 달리기 행사이다. 아틀란타의 등뼈-그러나 오염된 물고기의 그것인지 좀 굽은…-와도 같은 Peachtree Road를 따라 10킬로미터를 달리는 행사로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진짜 운동 선수도 참가하는 뭐 그런 행사란다.

하여간, 재작년부터 이 행사가 아니더라도 그런 달리기 행사에 도전해야되겠다고 마음만 먹다가 올해 드디어 굳게 마음을 먹고 3월이었나? 일요일 신문에 딸려 나오는 응모 원서를 화요일에 보냈다. 그리고서는 새 운동복도 사고, 달리기에 보다 적합한 운동화도 한 켤레 사서는 Ipod Nano와 짝을 지어 보다 체계적인 훈련을 하겠노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지 않아도 운동을 하는데 자꾸만 열의가 떨어지는 마당이라서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기대에 부풀었다가 반송된 원서를 받았다.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이 행사는 굉장히 인기가 많기 때문에 원서가 나오자 마자 보내지 않으면 나처럼 거절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웃돈을 주고 사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고… 하여간 그래서 새 운동복이며 운동화 구입 계획은 접게 되었다. 아이팟 역시 마찬가지. 늘 입던 반바지와 티셔츠에 달리기하기에는 어쩐지 조금 무거운 운동화를 신고 계속 뛰었다. 그러나 신나지 않았다. 열의는 계속 떨어져만 갔다.

그러다가 회사의 누군가가 새로운 연휴 계획으로 인해 참가하지 않게 되었다고 자기 번호를 내놓았다. 행사를 불과 열흘 남겨 두고서… 그래서 부랴부랴 조금 더 가벼운 운동복을 사고, 미친척하고 동네 나이키 할인매장에서 제일 싼 $50짜리 달리기 운동화도 샀다. 신발에 대해선 언제나 촌놈이라서, 신고 길들일 시간이 필요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산 날 바로 나가서 한 7-8킬로미터를 뛰어봤는데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세상이 정말 많이 좋아진 듯.

사실 지금까지 이런 정도로 운동을 해왔던게 몇 년인데 10킬로미터 정도 못 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운동을 오래하면 할 수록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기가 어려워진다. 게다가 나처럼 혼자 계속 하는 경우엔 정말 현상유지하기도 힘들어져서, 무의식중에 운동의 강도와 빈도 모두를 줄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한 번 그렇게 되면 그걸 다시 원래의 상태로 끌어올리기란 정말 어렵다. 그래서 이런 외부의 동기가 필요한 것이다.

어쨌든, 나는 시간을 공증받지 않은 일반인들 사이에서 뛸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시간을 재어주지 않을 것이므로, 스스로 잴 생각에 월마트에서 초싸구려 카시오 손목시계($16)도 하나 샀다. 이제는 복고라고도 고전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디자인이지만 나름의 아우라를 풍기는 이 손목시계를 차고 어제 학교 실내체육관에서 10킬로미터를 뛰어보았다. 시계의 수자가 그 기록으로 45분 28초. 실외에 언덕도 있는 주로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최대 10분을 덧붙여서 목표기록을 잡아도 55분… 한 시간안에는 꼭 들어와야 된다고 생각한다. 알고보니 친구 몇몇이 다 같은 그룹에 속해 있으니 망신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약간 비만인 친구녀석은 매년 뛰는데 한 시간 안에는 못 들어온다고… 그러나 녀석의 처가 한 시간 안쪽에 들어오는 달리기 베테랑이라서 경쟁할 것 같다. 나로써는 좋은 pacemaker를 두는 셈).

아마 이런 달리기 도전은 이것이 시작이며 또 끝이 아닐 것이다. 찾아보니 추수감사절인 11월 말에 반쪽 마라톤이 있어서, 이번 달리기가 끝나면 그걸 목표로 삼아 달리기로 벌써 마음을 먹었다. 일단 10 킬로미터는 그렇게 어렵지 않게 뛸 수 있으니 다섯 달 남짓 되는 시간동안 한 달에 2 킬로미터씩만 늘리면 충분할 듯. 언제나 그렇듯이 저주받은 육체와 싸우는 것은 괴롭지만 보람있는 전투와 같다. 새로운 목표를 삼았으니 또 당분간은 열심히 싸우는데 매진할 듯.

 by bluexmas | 2008/07/02 10:44 | Life | 트랙백 | 덧글(6)

 Commented by turtle at 2008/07/02 11:32 

제 첫번째 달리기 장벽은 4km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좀 열받는 일이 있었거든요. 달리는데 자꾸 그 생각이 나는 거에요. 아…내가 이렇게 얘기했어야 하는데! 이렇게 항의했었어야 하는데! 그랬으면 상대방이 이렇게 저렇게 했을텐데! 꼼짝 못했을텐데! 하고 머리 속으로 시나리오를 짜면서 분개하는 사이…어느 새 4km를 훌쩍 돌파해 버렸더라고요. -_-;;; 이것 참 기뻐해야 할 지 왠지 속물스러운 동기유발 요인에 부끄러워 해야 할 지 모르겠던걸요.

갑자기 생각나서 써봤어요. 아무튼 10km 달리기 잘 끝내시길 응원하겠습니다!

 Commented by 笑兒 at 2008/07/02 11:57 

단거리 달리기는 조금 뛰겠는데, 장거리 (100m이상;; )으로 들어가면 도저히 못뛰겠더라구요. 어려수부터; 체력장때 오래 달리기 하면 구역질을 해대서 ;;ㅅ;; 어제부터 운동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달리기는 두려워요.

 Commented by liesu at 2008/07/02 12:29 

저도 운동회 너무너무 싫어했었어요. 키가 크면 무조건 잘 달릴거라는 시선-하지만, 전 항상 꼴등으로 들어왔지요- 그런데, 중간으로 들어올만큼 달리지 못하니. 가끔, 걷지 말고 뛰라는 이야기 마저 듣다보면..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 없는 날. 유일하게 전 괜찮았던 운동회가 6학년 때, 달리기 대신에 선생님과 짝지어 보물찾기(?)로 대체되었던 운동회랍니다. 정말 곧 죽어도 싫은 행사였다는..

 Commented by blackout at 2008/07/03 13:17 

저는 둘이 뛰어서 2등이 제일 좋은 성적이었던것 같아요…^^ 국민학교 운동회때 내가 뛰는 모습을 할머니께서 보시고는…”무슨 정신 박약아가 뛰는거 같냐…” 그러셨다는…ㅠㅠ. 한때 3마일씩 뛰었는데 요즘은 그냥 eliptical machine만 쓰는거 같네요.

 Commented by basic at 2008/07/03 16:03 

저는 학교다닐 때 단거리 경주에서는 언제나 꼴찌였지요. 뚱뚱한 편은 아니었지만 선천적으로 운동신경이 형편없는 그런 종류예요. 그래서 장거리에서는 정말 이를 악물고 뛰었어요. 장거리는 자기와의 싸움이고 단거리처럼 순식간에 일어나는 순발력의 경쟁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장거리고 단거리고 간에 달리기와는 담을 쌓고 지내네요;; (어린 시절의 악몽;)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7/04 11:53 

turtle님: 저에게도 사실 그런 경우가 많죠. 물론 과격한 노래들로 아드레날린 분비를 촉진시키기도 하지만, 어릴때 저를 돼지라고 놀리던 놈들을 생각한다거나…하하. 그나저나 상하이 생활은 재미있으세요? 멋지구리한 건물 많던데. 너무 많이 지어서 지반이 조금씩 내려간다고 들은 것도 같아요.

笑兒님: 체력증진이 필요하신 것 같아요! 하루에 100미터씩 늘려보세요. 아직 20대 중반도 아니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_-;;;;

liesu님: 보물찾기가 또, 늘 꽝이었던 불행한 개인사를 지니고 있던 저로써는 그것도 별로 반갑지 않았을 것 같아요. 흐흐…

blackout님: 뭐 그정도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네요^^ 할머님께서 너무 상처를 주신 것 아닐까 몰라요. 전 Elliptical은 그냥 운동 마무리로 10분씩 해요.

basic님: 학교 다닐때 장거리하면 여자애들이 본다고 처음에 미친듯이 뛰는 애들 있었어요. 그럼 여자애들이 막 박수치고 응원도 해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