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의 비늘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해왔던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딱히 내세를 믿는 사람도 아니고, 또한 내세라는게 있다고 해도 지금의 나 이전/이후의 나라는 사람은 내가 아닐테니 나는 지금 가진 삶을 하나밖에 없는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겠지. 그래서 특별하게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 없다고 해도 거의 대부분의 순간에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을 해.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순간들도 있어. 말하자면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라는 일종의 허무함같은 걸 깊이 느끼면서 정말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드는 때가 있는데 요즘은 그게 좀 자주 온다는 느낌이 들어. 내가 그런 기분을 처음 느낀게 언제였더라… 요즘들어 이런 기분을 내가 원하는 것보다 조금 더 종종 느끼는 것 같아서 대체 이러한 기분이라는게 내 삶의 언제, 어디쯤에서 시작되었을까 생각해봤는데 아마 그건 초등학교 5학년의 봄이었던 것 같아. 일요일이었는데, 아버지 모교의 총동창회 같은게 서울 근교의 어느 산에서 있었거든. 그런 자리를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 아니 솔직히 말하면 싫어하는 편이었지만 뭐 부모님이 가자는데 가야지 어쩌겠어. 하여간 하루 종일 산을 쏘다니다가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그런 생각이 딱 들더라구. 아, 지금 이 삶에는 끝이 있구나… 그날 저녁에 해야 될 숙제가 조금 남았었는데 참 하기 싫더라구. 이거 해서 뭐에다 쓰려구, 라는 생각이 그때 처음 들었던거야. 뭐 이제서야 내 삶에 대한 아무런 조건 없는 동기의 성벽을 눈깜짝하는 순간에 허물 수 있는 허무함과 같은 그런 감정.
그날도 그렇더라구. 한 30분쯤 앉아있는데, 사실은 더 이상 앉아있기 싫다는 생각이 너무 진하게 들었거든. 너무나도 지긋지긋한 일상의 껍데기를 좀 깨보고 싶어서 뭔가 다른 것을 찾아봤는데 그게 오히려 그 지긋지긋한 일상보다 더 지긋지긋하다는 느낌이 들면 정말 마음만이라도 그 자리에 얼어붙는 기분이 든다니까… 그리고 1초라도 빨리 그 자리를 뜨고 싶어지는거야.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예의-사실 이것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기 자신의 체면을 위한 가식적인 배려가 아닐까 싶어, 남 기분을 상하지 않기 위한 배려가 아니라 자기가 남에게 욕 먹는 걸 방지하는 배려, 그리고 말하기는 ‘상대방을 위해서’ 라고, 허울 무지하게 좋지?-라는게 있으니까 그렇게 자리를 금방 뜰 수는 없고, 그냥 내 돈을 쓰지만 간만에 맛있는 거나 먹자, 라는 생각으로 자리를 지켰어. 뭐 혼자 밥 먹는게 어디에서라도 거리끼지는 않지만, 가끔은 그게 싫은 때도 있게 마련이니까. 어쨌든 시간이 지날 수록 상대방에게 그다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던게, 입에서 나오는 얘기의 대부분이 예전에 했던 얘기였거든. 그러니까 그냥 맞장구만 잘 쳐주면 되는거잖아… 게다가 음식을 먹고 있다는 핑게로 아주 열성적으로 맞장구 쳐줄 필요도 없고…거기에 나도 언젠가 했던 얘기들로 화답을 해봤는데, 역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눈치더라구. 뭐 다 그렇지…
아무런 사전경고없이 바로 여름이 시작된 어느 날의 밤, 창문을 열고 차를 달리는데 팔에 감기는 셔츠의 소매가 너무나도 끈적끈적하더라구. 그런 끈적끈적한 기분이 정말 날씨 탓인지, 아니면 그냥 그렇고 그런 기분 때문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정말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운전을 하면서 요즘의 나는 허무함을 숨쉬는 걸로도 부족해서 온몸을 무슨 비늘 같은 걸로 뒤덮고서는 물고기가 물 속에서 헤엄을 치고 돌아다니면서 물의 존재를 느끼듯이 공기를 이루고 있는 미세성분(산소, 이런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 아주 미세한 성분…배운지 너무 오래되다보니 잘 기억이 안 나네-)의 그물사이에 숨어있는 허무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사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했다니까.
그래서 그날 집에 돌아와서는 욕실 어딘가에 아직도 포장을 뜯지 않은채로 있는 때수건-이태리 타’올’ 이라고 있잖아… 분명히 처음 미국에 올때 가지고 온 것 같은데 내가 산 게 아니라서 누가, 왜 이삿짐에 끼워넣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는-을 하나 뜯어서 때라도 밀듯 이걸 좀 벗겨내보면 허무함을 좀 덜 느끼게 될까 생각을 했다니까. 그러다보니 생각나는게 있었는데, 예전에 소년중앙 연재로 읽던 이상무의 만화…있잖아, 독고탁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거. 제목은 잘 기억 안 나지만 분명히 무슨무슨 그라운드, 나 뭐 그런 것이었겠지. 하여간 독고탁이 드라이브 볼이나 더스트 볼, 그리고 그 두 가지를 합친 드라이브 더스트 볼 뭐 이런 걸 그야말로 개발해서 다른 어린이 야구팀을 쑥대밭으로 만드는게 이 만화의 주요줄거리겠지만,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건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 친구라고나 할까? 어찌보면 이현세의 외인구단과도 비슷하게 독고탁의 야구팀도 거의 버림받다시피한 어린이들이 주축을 이뤘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수비위치가 잘 기억나지 않는 챨리라는 친구가 있었어. 옛날에 나왔던 어느 댄스그룹의 만복이는 완전흑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복이였지만, 챨리는 흑인 혼혈아였지. 아마도 동두천 출신이었을거야. 아버지야 뭐 잠시 주둔했던 미군이었을테고, 어머니가 분명히 있었을테지만 버림받았는지 고아원을 전전한 불쌍한 챨리는 고아신세인 것도 서러운데 거기에서조차 애들에게 개취급을 당하곤 해, 혼혈이라서… 그래서 검둥이라고 놀림을 당하고 얻어맞기 일쑤였던 챨리는 어느 날 고아원에서 비누를 훔쳐들고 산으로 올라가서 비누가 닳아 없어지고 살갗이 빨갛게 일어날때까지 때수건으로 온몸을 밀지만, 검은 피부를 하얗게 만들 수는 없었다고 얘기했던 기억이 나, 물론 만화에서… 참 애들 보는 만화치고는 은근히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았다고 이제서야 생각이 들지만, 챨리가 야구를 열심히 해서 메이저리거로 성공했다면 혹시라도 마이클 잭슨처럼 하얘지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까, 그건 아직 잘 모르겠네.
하여간, 눈에 보이는 까만 피부도 못 벗겨낸다는데, 그것도 마구를 쌩쌩 던져대는 만화세계에서, 나라고 무슨 수로 이 현실세계에서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비늘을 벗겨내겠어? 그것마저도 행동에 옮긴다는게 허무하게 느껴져서 그냥 그만뒀지만, 요즘은 가끔 야근을 하고 해가 진 이후에 돌아오면 문을 활짝 열고 달리는 어두운 고속도로에서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 말고 낮동안 햇빛과 또 형광등 불빛(이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치겠지? 점심시간 45분을 빼놓고는 뭐 별로 햇빛을 받을 일이…)을 흠뻑 머금은 비늘이 반짝이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 아니면 환상에 빠질때가 있어. 왜, 예전에 아버지가 미국에서 돌아오셨을때 어디에선가 공짜로 얻어온 야광 열쇠고리-수자 1 모양이었던-를 그때 유행이던 나이키 배낭에 달고 다녔는데, 자려고 방의 불을 끄면 한참동안 이 열쇠고리가 아주 밝게 빛났었거든. 형광등 불빛을 잔뜩 머금은 바로 다음이니까. 뭐 어쨌거나 요즘은 정말로 비늘이 생기는 건 아닌가, 두려워서 집에 와서는 그 텅텅 빈 집의 모든 불들을 다 켜 놓고는 잠들때까지 있다가 잘때가 되면 분명 대한항공은 아닌 어느 항공사를 이용한 비행에서 받은 걸로 기억되는 안대를 준비해서는 양치질을 마치고 교정기를 끼고서는 방마다 돌아다니면서 불을 하나씩 꺼. 생기는 건 생기는 거고 나는 보고 싶지 않거든. 참, 그 전에 침실에 있는 싸구려 아이키아 취침들을 미리 켜 두지. 그리고 그렇게 불을 다 끈 다음에는 침대에 몸을 눕히고 안대를 한 다음, 내가 어둠 속의 나를 볼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면 그제서야 더듬더듬, 취침등의 스위치를 찾아서는 끄고 잠에 들어. 요즘 이렇게 살고 있었지. 그래서 목소리의 울림이 줄어든걸까? 난 모르고 있었는데.
# by bluexmas | 2008/06/18 13:01 | — | 트랙백 | 덧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