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대로 되라지
원래 팀 애들과 조율해야 될 것들이 매끄럽게 되지 않아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평화로운 금요일이었어요. 계속해서 다른 층의 팀을 돕고 있기 때문에 분위기 파악이 잘 안 되고, 따라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구석이 있기는 해도 별 큰 문제는 없어보였거든요. 오후부터는 비가 오고 주말 내내 춥고 흐릴거라고 했지만(벌써 비는 왔죠, 미친 듯이…), 낮에는 정말 간만에 너무 날씨가 좋아서, 차를 몰고 한인타운이 있는 동네까지 가서 순두부로 점심을 먹고 슬렁슬렁 일을 하다가 모 선배가 커피를 마시자고 해서 내려간 로비에서 돕고 있는 팀의 매니저와 마주친게 화근이었죠.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영어로 한 마디라도 더 하고 싶어서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 제 잘못이라고나 할까요? 갑자기 정색을 하고는,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진척이 있냐, 확인해야겠으니 당장 들고 내려와라, 그리고는 물어보더군요. 주말에 나올 수 있냐고, 목요일 오후 세 시에…
저의 대답은…당연히 No였죠. 진짜 0.1초 동안 어떻게 대답해야되지? 라고 생각했지만, 못하겠다는 말 아닌 다른 대답을 생각할 수 없더라구요.
사실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이렇게 누군가 주말에 일할 수 있냐고 물어봤을 때 못 하겠다고 한 게. 언제나 설사 내키지 않아도 Sure Thing!을 외치고 속으로는 온갖 욕을 하면서 주말에 나왔었지만, 이렇게 다른 팀을 도와주는데 주말에 나오라고 그런 것도 처음, 또한 목요일 오후에 갑자기 나올 수 있냐고 물어보는 것 역시 처음… 언제나 회사에선 소심한 말단 사원이다보니 해야 될 다른 일도 제쳐두고 나왔던 경우도 있었겠지만, 이번엔 뭐랄까 못 나오겠다고 해서 욕 먹어도 먹는거지, 이렇게 나와봐야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는 인상만 줄 것 같더라구요.
물론, 주말에 계획이 없는 것도 아니죠. 하지만 저의 팀에서 제가 관리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저 스스로 일이 얼마만큼 되어야 한다는 느낌이 확실히 있다면 주말에 나와서 일하는게 문제가 될 이유는 전혀 없죠. 뭐랄까, 저는 주말에 못 나오겠다고 하고 마음 불편해하느니 그냥 나와서 일하는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왔거든요. 그러나 이제는 마음이 불편해도 나가고 싶지 않더라구요. 게다가 다른 팀을 도와준다는 건, 주로 누가 시키는대로 도면을 그리는 일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지 뭐 조금이라도 디자인에 관련된 것들을 하게 되지는 않죠, 왜나면 다른 원래의 팀원들이 많은 시간을 들인만큼 프로젝트. 즉 건물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죠. 뭐랄까, 하나의 프로젝트를 계속하게 되면, 건축의 경우에는 2차원 세계에서 그려진 도면들을 조합해서 3차원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가질 수 있는 상황에 이르게 되죠. 오래된 컴퓨터 게임 Doom에서 건물의 복도를 왔다갔다 하는 것처럼, 같은 도면을 계속해서 들여다보면 건물이 가지고 있는 공간의 전체적인 느낌이 머릿속에 자리잡게 되고, 그 단계에서 어떤 식으로든 디자인에 변화가 생기게 되면, 그 변화로 인해 건물의 다른 부분에서 생기는 변화들마저 쉽게 잡아낼 수 있게 되죠. 하지만 저는 이제 2주 남짓 일해서 그런지 계속해서 건물을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고 있는 꼬라지에요. 아직도 건물이 가지고 있는 공간의 전체적인 이미지가 머릿속에 없죠.
하여간, 매니저님께서는 괜찮다(It’s fine)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그렇게 괜찮지는 않을거에요. 이렇게 하는 프로젝트가 끝나면 꼭 누군가가 물어보거든요. 걔, 일 어떻게 했냐고… 지금의 이 상황이 그로 하여금 어떤 대답을 내어놓게 할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하여간 그와 공포의 대화를 나누고 올라가서는 정말 미친듯이 도면을 그려서 오전에 뒤쳐졌던 진도를 만회하고, 네 시 반 부터 팀 미팅을 한 시간 반 동안 하고, 주말에 못 나오기 때문에 해야 될 일을 더 하느라 일곱 시 반에 퇴근… 누군가가 고국에서는 금요일날 일곱시 반 퇴근은 장난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지금 고국에 살고 있지 않는터라 그런 비교는 전혀 무의미한 것일테죠? 하여간 그렇게 갑자기 벌어진 여러 스트레스 가득한 상황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학교 체육관에 들러서 운동을 하고, 제가 만드는 파스타와 맛을 비교하기 위해서 근처 생파스타 집에서 시험삼아 파스타(역시 제가 만든 것보다 백만배 낫더군요!)를 먹어보고, 최근에 발견한 마음에 드는 바에서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다가 마실 술을 더 사가지고 들어왔죠, 금요일 저녁에 밖에서 밥을 먹고 혼자 바에 기어가서 술을 마신 것도 참으로 오랫만이에요. 그냥, 이런 날은 사람 구경을 하고 싶더라구요. 갑자기 주룩주룩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밖에 앉아있어야 할 손님들이 안에 가득찬 바는 그 누구도 어떤 얘기라도 알아들을 수 없을만큼 시끄러웠고, 거기에 노래를 아주 잘 부른다고 말할 수 없지만 얼굴이 그럭저럭 잘 생겨서 용서가 되는 남자가 노래를 부르기까지 해서 관광객 백만명이 들어찬 동굴과도 같은 느낌이었어요. 아, 주절주절 말도 많고 얘기는 처음의 주제와 벗어나 다른 곳을 방황하고 있지만, 핵심은 바로 그런 것이죠. 처음으로 될대로 되라지, 라는 심정으로 No를 말했다는 것. 이게 화근이 되어서 실업수당을 받아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되면 바로 업데이트를 할께요. 그럼 시간이 많아져서 그동안 생각만 하고 쓰지 못했던 모든 잡스러운 글을 다 써서 올릴 수 있게 될 듯.
# by bluexmas | 2008/04/12 13:42 | Life | 트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