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에 반하는 삶

내일 저녁에 손님이 오기로 해서 삼겹살이나 구워먹을 생각으로 퇴근후 장을 보러 갔는데, 한국수퍼마켓에 평소라면 찾기 어려운 족발이 유혹의 손길(발길이어야만 하는 걸까요…?-_-;;;)을 내밀고 있더군요. 거의 언제나 목요일 퇴근 이후에 장을 보는데, 그러면 저녁이 늦어지는터라 배가 고파지고, 또 배가 고파지면 계획하지 않는 뭔가를 살 확률이 높아진다는 건 살림하시는 분들이라면 다들 아실 듯… 하여간 이 동네에서 제대로 된 족발을 보기란 은근히 힘들어서 눈 딱 감고 저녁으로 이걸 먹어줄까… 라는 유혹에 휩싸여 서너번이나 팩에 말끔하게 싸인 족발을 들었다 놓았다 했지만 결국 이를 악문채 돌아서야만 했습니다. 오늘 저녁은 족발, 내일 저녁은 삼겹살… 뭐 이런 식으로 식단을 꾸려 나갔다간 어떤 대가를 치뤄야 할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다음 주에는 평소라면 하루 건너 뛰는 5km를 매일 뛰게 된다고나 할까요…

뭐 그런 욕망을 억지로 잠재우고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뭔가 먹고 싶은 욕망 따위는 깨끗이 사라지게 마련이지만, 뭔가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한다는 자체만으로 느끼는 짜증의 여운은 참으로 오래 가기 마련입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끝에 가서는 대체 무슨 욕망은 제대로 채워지고 있는 것일까, 라는 별로 개연성 없고 참으로 허무주의적인 패배감 따위에 시달리게 되죠. 그러다가 때로는 뭐 그래도 월급 꼬박꼬박 받아 먹고 밥 굶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작은 일들에 쓸데없이 짜증 따위를 느끼는 나라는 사람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것일까, 라고 옛날 보리고개가 횡행하던 시절에 유행하던 안빈낙도나 안분지족따위의 지극히 세뇌스러운 생각마저도 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또 대체 행복이라는 건 뭘까, 라는 너무나 철학적이어서 본인의 사고 능력 및 범위로는 도저히 답을 구할 수 없는 화두의 언저리에서 발을 담그고 비비적거리는 추레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때쯤 되면 지난 몇 년 동안의 삶이 아주 빠르게 머릿속에서 되감기 모드로 돌아가면서 그 동안 수없이 저질렀던 시행착오에 대한 복기마저 하게 되고, 그럼 순간 혈압이 아주 빠르게 오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쯤 되면 차창을 활짝 열고 4월에 부는 그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찬 바람을 맞으며 대상도 목적도 없이 끓어오르는 감정을 삭힙니다. 어차피 답은 없는 것, 뭐 그렇게 미친 듯이 또는 끊임없이 생각을 해 대고 있는지 원…

이 모든게 다 그놈의 족발 때문인거죠 뭐.

 by bluexmas | 2008/04/04 13:33 | Life | 트랙백 | 덧글(7)

 Commented at 2008/04/04 13:5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mila at 2008/04/04 14:25 

님의 글을 읽으니 저도 며칠 전에 한국그로서리에서 본 족발이 떠올라요. 언제 마지막으로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게 족발인데 음식밸리에 어찌나 족발이 자주 올라오던지…한 번 먹어볼까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마침 마켓에 꽤나 먹음직스런 족발이 보이더라구요. 가장 작은 팩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결국 버려두고 왔다죠. (저도 이 작은 욕망도 못 채우는 삶이란..생각에 잠시 우울.)

* 처음으로 남기는 덧글수다가 길었죠? 실은 작년부터 글을 읽어와서 저 혼자 친숙하게 느껴져요. 인사드릴 타이밍을 찾았는데…이렇게 족발 얘기에 그만. 하하. 반갑게 맞아주시면 자주 인사하고 싶네요. 🙂

 Commented by 도로시 at 2008/04/04 14:47  

족발로 촉발된 생각의 소용돌이 그리고 그것을 삭이는 과정의 대장정. 흠- 지난 시간을 뒤쫓으며 느끼는 좌절감과 회한 뭐 그런 거. -.- 어우~ 그런 거 한번 떠오르면 잠이 안오죠.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보면 얼굴은 어느새 화끈거리고 심장은 사정없이 벌렁거리고.. 과거를 되새기고 또 되새겨 너덜너덜해지면 그런 ‘화’의 감정도 조금씩은 누그러지기도 하더라며 신기해 한 적도 있었지만 일단은 내 상태가, 지금의 상태가 좋아야 그런 기분에 지지않고 통제 가능한 거 같아요.

뭔소릴 하는건지 원.. 그나저나 오늘 저녁 메뉴는 삼겹살? 즐거우시겄어요. ^.^ 전 오늘 혼자 명동서 대충 먹고 오랫만에 씨네큐브 가서 영화나 한편.. ^^;

 Commented at 2008/04/04 16:0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asic at 2008/04/05 02:41  

이상하게 족발을 이날 이때껏 먹을 기회가 없었네요. 편육이랑 비슷한 맛일까요? (그러고 보니 닭발도 먹은 적이 없는;) 짜증을 가라앉히시고 담에는 꼭 사 드세요-

 Commented by hotcha at 2008/04/05 09:19 

내 얘기인줄 알았어요.^^;;

금요일마다 한국수퍼에 따끈한 족발과 떡이 배달되는 날이거든요. 한국수퍼를 자주 가진 않지만 특히 금요일엔 더 안가요. 고기를 잘 안 먹는데도 왠지 한국적인 그 족발의 무지막지한 유혹땜에…

참 그리고 she loves me를 먼저 시작하지 말고 she loves me not을 먼저 시작하면 she loves me로 마감하지 않을까요? 난 그러는데..ㅋㅋ~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4/06 16:09 

비공개 1님: 원래 상념이라는게 다 그렇죠. 줄줄이 비엔나 내지는 우울한 스무고개처럼 끝없이 줄줄줄 이어지는게…

Smila님: 더 길어도 괜찮답니다^^ 그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번역하신 분도 이글루에 블로그를 가지고 있었는데 요즘도 꾸려나가시는지 모르겠어요. 미국 어디에 계시는지 모르겠는데 그 동네 족발맛은 어떨까 궁금하네요.

반갑게 맞아드릴테니 자주 들러주세요^^

도로시님: 미련이 많이 남는 삶을 살면 안되는데 정말 혹덩어리처럼 달고 평생 살아야 하는 미련들이 가끔 있죠. 명동에선 뭘 드시나요? 전 늘 명동칼국수 정도나… 충무김밥도 생각나네요. 안 먹어본지 오래됐지만.

비공개 2님: 살을 포기하시면 이제 다이어트로 없애버리시는건가요?^^ 브런치로 삼겹살이라니 정말 훌륭합니다. 부러워요-_-;;;

basic님: 편육이랑 족발, 맛이 비슷하죠. 편육도 머리라면 더 맛있는데… 저도 닭발은 먹은 적이 없어요. 앞으로도 글쎄…

hotcha님: 제가 hotcha님 얘기 듣고 쓴거 비밀로 하기로 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그건 노래 가사였어요. 꽃잎의 수를 미리 세보고 짝홀수에 따라 다른 전략을 세운다면 뭐 she loves me도 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