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봄
저의 가족들이 저의 멍청함을 놀려 먹기 위해 두고두고 울궈 먹었던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그 지속기간이 길었던 것은 아마도 프로야구 원년 한국 시리즈에 관련된 것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니까 해는 1982년, 9시 땡 치면 뉴스에 바로 나오셔서 그날의 활약상을 알려주셨던 덕분에 땡전이셨던 우리 대머리 전통께서 민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국풍 81등등과 함께 야심만만 내어 놓았던 프로야구가 출범했고 저는 이만수 선수 때문인지 파란색 때문인지 삼성 라이온즈의 팬이 되었죠. 그리고 해는 흘러 가을로 접어들고 한국 시리즈, 다들 기억하시겠지만 삼성은 잘 나가다가 그 불운의 이선희 선수가 역전 만루 홈런을 맞아 우승을 놓쳤고,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더라구요. 이제 야구 끝나서 다시 안 한다고…
…그러니까 저는 너무 순진한 어린이어서 다음해 봄이 돌아오면 야구도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조차도 못한 것이죠. 가족들이 대체 이걸 얼마나 두고두고, 또 잊을만하면 울궈 먹었는지, 아마 고등학교 때까지도 철수(가명) 초등학교 1학년 때 기억나? 야구 더 끝났다고 울었잖아…
너무나 민망한 어린 시절이었던 거죠.
뭐 야구와 관련된 그렇게 우스운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는 해도, 사실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렇게 야구를 즐겨 보지는 않았어요, 무엇보다 저는 nerd에 가까운 인간이었던데다가 비만이어서 그 모든 스포츠에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대학 선배인 박찬호 선수가 미국에 진출하면서 조금씩 더 보게 되고, 그러다가 기술적인 면도 이해하고 ESPN과 같은 사이트의 글들도 즐겨 읽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야구광이 되었죠. 그래서 학교를 지원할때도 사실 메이저리그 팀이 있는 도시를 위주로 지원했고, 결국 이렇게 아틀란타로 오게 된 것이었구요. 또 운전면허를 따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자 가장 먼저 한 것도 야구장엘 가는 것이었어요. 2002년 여름이었는데, 탐 글래빈이 선발 출장했었고, 스캇 롤렌이 홈런을 치고 필리로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뤘구요. 그리고 저는 머리가 커서 7 7/8짜리 모자를 사야만 했죠.
하여간 미국 생활도 어느 정도에 접어들어서 이제는 미식축구도 보게 되었지만, 야구는 아직도 저에게 최고의 스포츠로서 그 왕좌를 굳건히 지키고 있답니다. 일단 제가 스포츠에 대한 애정은, 한때 뭐 기본 체력도 안 되는 인간으로서 운동을 잘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일종의 대리만족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나 싶어요. 어릴때에도 남들 전혀 안 보는 육상이나 역도 따위의 종목 중계를 보는 걸 굉장히 좋아했거든요. 거기에다가 야구는 신체접촉이 별로 없고, 움직임과 멈춤이 순간적으로 구분된다는 점에서 언제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되니까 틀어놓고 딴 짓을 해도 된다는 장점도 있구요. 뭐 오랜 역사나 많은 해석의 여지를 주는 기록을 낳는다는 점, 또한 역도를 빼놓고 거의 유일하게 유니폼에 허리띠가 있는 스포츠라는 점 역시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사설이 길었는데, 이렇게 야구를 좋아하는 탓에 매년 이맘때쯤 야구의 잎이 하나씩 둘씩 지는 계절이 찾아오면, 저녁시간에 집을 감싸고 도는 조용한 공기에 적응을 못하게 되는 경우가 참 많아요. 이제 많아봐야 ALCS 두 경기, 월드 시리즈 일곱 경기가 남았고, 그게 끝나면 또 서너달 후의 이듬해 봄까지는 그 어떤 스포츠나 텔레비젼 프로그램도 야구를 볼 때 만큼의 즐거움을 주지는 못하니까요. 그래서 요즘은 부쩍 쓸쓸함을 많이 느끼는 기간인 것이죠. 적어도 올해에는 또 야구 경기가 없을 거라는 실망감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때까지는.
하지만 또 스토브 리그가 지나고 2월말 쯤이 되어 다시 따뜻한 기운이 스멀스멀 찾아오는 것을 느낄 때쯤이면 희망도 다시 또 피어오르겠죠. 새 시즌의 온갖 예측과 기대와 또 전망이 빼곡이 들어찬 각종 인터넷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며 글들을 읽고, 또 새로 마이너리그에서 올라올만한 선수들이 얼마나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지 시범경기의 박스 스코어를 열심히 확인하다 보면 3월은 훌쩍 지나갈테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달 4월이 찾아오면 또 그렇게 야구의 잎은 다시 새롭게 피어오를테니 열심히 기다리면서 겨울을 보내게 되지 않을까요… 언제나처럼 그렇게 겨울의 시간은 해를 거듭할 수록 조금 더 우울하고 또 조금 더 쓸쓸하다고 해도.
# by bluexmas | 2007/10/20 13:17 | Life | 트랙백 | 덧글(11)
다만 메이저리그는 전혀 모르고;; 한국야구만 ^^:; 양신 은퇴하기전에 한번 봐야하는데 ㅠ.ㅠ 이럴때면 짐싸들고 한국가고싶어집니다..흑흑.
비공개 덧글입니다.
딱히 응원하는 팀이나, 선수를 정해놓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경기장에도 가보고, 티비 중계도 종종 보는 경기에요 ;ㅅ;
비공개 덧글입니다.
레드삭스와 인디언스 경기를 요즘 보는데… 뭐, 특별히 어느 한팀을 응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왕이면 레드삭스가 이겨서 월드 시리즈에 나갔으면… 하는 맘 정도는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요맘때면.. 그런 마음이 들어요. 월드시리즈가 가까이 올수록 아~ 이제 야구시즌도 마감이구나… 내년, 꽃피는 봄이 와야… 또 볼 수가 있겠구나.
마구 서운해지고, 아쉬어지고.
좀 더 나이가 들면… 야구장근처로 이사가고 싶어요.
슬슬 걸어서 경기장에 갈 수 있게.^^
물론, 불꽃 터지는 소리가 조금 시끄럽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비공개 1님: 베켓은, 지명당시부터 워낙 기대가 컸지만 손가락 물집을 위시한 잦은 부상으로 그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다가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그 기대를 완전히 채워주는 투구를 보여주면서 결국 지금의 초에이스급으로 성장을 했죠. 정규시즌에서 단 한 번도 완봉승이 없던 투수가 스물 셋의 나이에 팀이 탈락 위기에 처한 경기(NLDS)에서 삼진 열 두개를 잡으면서 완봉, 그래서 팀은 결국 월드시리즈에 올라갔고 뉴욕에서 단 3일 휴식 후에 등판, 다시 완봉승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죠. 말린스의 재정문제 때문에 결국 보스턴으로 트레이드 되어 작년 한 해 적응하는데 좀 애를 먹었지만(5점대 방어율, 엄청난 피홈런), 이제는 완전히 에이스로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어제의 투구도 감동이었죠.
저는…어제 오후에 대대적으로 장을 보느라 한 시부터 네 시까지 장을 보았답니다. 집에 오니 거의 초죽음이었어요^^
笑兒님: 뱅쿠버쪽에서는 매리너스 경기를 보게 되는건가요? 여자팬들을 위한 야구 모자나 변형 유니폼들이 예쁜게 참 많은데…
재인님:^^;;; 그래도 삼성은 꺾었잖아요. 오랜만에 저 위에서 언급한 스포츠 피디 친구와 전화통화를 했는데 두산의 리오스가 22승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기절할 뻔 했어요. 게다가 30도루 이상이 세 명? 그러니 너무 아쉬워 마세요^^
비공개 2님: 그렇게 생각하시면 삶이 너무 우울하잖아요. 삶의 의미는 그 유한함에 있으니 낙관적인 사고를 가지는 것은 사실 여반장(如反掌)이랍니다…
erasehead님: 화이트삭스 팬이셨죠… 감독 연장 계약도 좀 그렇고 팜이 별로 안 좋아서 앞으로 몇 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야구장에 가까이 살면 좋죠. 아틀란타의 야구장 근처는 사실 좀 빈민가라서 살기가 그래요. 셀룰러 필드쪽도 그렇지 않던가요? IIT에서 야구장이 바로 보이던데…
한참 잘나가던 박선수가 먹튀라고 욕먹기 전에,
아주 잘하시던 중간에 주춤하던 때 즈음 중계를 보다,,
홈런 먹고 의기소침해 있는 모습에
눈가를 촉촉히 적시며
“어우~우리 박선수 불쌍해서 어뜨케~~~”
한마디 했다가, 오빠한테 욕 바가지로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돈도 10원 못버는 니가 이만배 더 불쌍하다고..
옛 생각에 다시 코끝이 찡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