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관성, 그리고 진공
환상
작년 언젠가, 계절이 막 겨울로 접어들 무렵 P와 M 선배, 그리고 저는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대체 화제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데, 제가 뭐라고 얘기를 하자마자 P선배는 기다렸다는 듯 저를 닦아세웠고 그런 P선배에게 왜 저를 그런 식으로 대하냐고 묻던 M 선배… P선배는 그러더군요 ‘생각이 잘못되었으면 고쳐줘야 된다’고.
……….Mea Culpa.
유난히 기억력이 좋은 제가 대체 무슨 얘기를 했길래 저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면 아마도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지워버렸을지도 모르긴 하지만, 그 때 그 상황을 며칠동안 곱씹으면서(그러니까, 며칠 곱씹어서 삼키든지 날려버렸던 모양이죠?-_-;;;)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 생각을 남에게 관철시키려고 싸우는 것이 실은 현실과 현실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삶에 대한 환상들끼리의 충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어떤 사람의 환상은 보다 현실에 가깝고, 또 저 같은 사람의 환상은 환상에 가깝고… 그래서 현실에 가까운 환상을 지닌 사람은 자기의 환상이 현실이라고 착각한 나머지 거의 모든 상황에서 맞다고, 그러니까 너는 틀렸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고, 저 같이 저의 환상이 그나마 환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환상이 짐짓 현실인 척 속이고 싶지 않으니까 대꾸를 안 하게 되고…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Golden Compass를 보았는데, 개인을 나타내주는 Deamon을 보면서, 결국은 저것도 등장인물이 가진 환상이 육화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죠. 하여간, 현실에 가까운 환상이든, 정말 환상에 가까운 환상이든 알고 보면 선명하기가 다른 신기루에 불과할텐데, 제 환상을 닦아 세워 선명도를 높인다 한들, 뭐 그렇게 달라질 구석이 있을까 싶었죠. 어차피 환상은 환상인 것을.
관성
관성이라는 것이 환상의 또 다른 산물인지, 아니면 진정한 현실의 부산물인지 저 역시 그렇게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뭐라고 규정할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관성이야말로 삶에 문신처럼 새겨진 습관과 고집의 그림자가 아닐까 싶어요. 그러니까 문신과 같은 그림자라서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에도 어김없이 그 형체는 길바닥에 드리워지겠죠. 그런 날은 조금 음산한 느낌으로… 위에서 얘기한 환상은 애초에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다 쳐도, 관성은 겉으로 보기엔 그런 느낌을 주지 않더라구요. 그리하여 서로 다른 두 관성이 만나면 처음에는 조금 더 세기가 강해보이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보다 낙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둘 중 하나는 곧 그 두 개의 관성계(界)가 하나로 합쳐지지 않을까, 라는 기대에 부풀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관성은 관성이니까 그렇게 낙관적인 상황이 일어나기 이전에 강한 반발력을 보여 원래의, 아니면 그것보다 더 먼 거리를 유지해버리고 마는 작은 비극을 만들어 내곤 한다더라구요. 뭐 전해내려오는 말들 가운데 ‘인체는 하나의 작은 우주’라는 종류의 것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결국 삶이라는 것은 그 소우주가 만들어내는 중력과 그 중력으로 인해 생기는 관성으로 인해 유지되는 무수히 작은 조각들의 모음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니 지탱해지는 힘이 없어지면 그 개체는 조각조각 흩어질테고, 그렇게 자아가 소멸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강한 반발을 보여야만 하는 것이 바로 관성의 본질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겠죠.
그리고, 진공
제가 그렇게 오랫동안 품어왔던 환상이 결국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서부터는 단 한 번도 녀석의 목줄을 풀어준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일요일 저녁, 갑자기 들더라구요. 그건 전자파로 그 자글자글한 주름이 메꿔지고 평평해진 뇌 때문에 빚어지는 두통이 몰고온 깨달음과도 같은 것이었어요. 환상이라는 건, 아무리 스스로 완전한 개체라고 해도 육화의 단계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니까, 그걸 알고 난 다음부터는 허무주의에 쩔어서라도 ‘자, 이제 바로 제가 오랫동안 키워온 환상이라는 녀석이에요. 아직도 철 안 든 주인의 이상사회적인 사고방식에 푹 젖어 물을 흠뻑 먹은 솜마냥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니까 채찍으로 맘껏 휘갈겨 보세요’ 라고 선뜻 길가던 구경꾼에게 내밀수는 없었다는 얘기에요. 그리하여 제 손에 들린 목줄에 매인채 풀죽어 납작 앉아있는 환상과, 언제나 타 계(界)와의 통합을 추친만 해보다가 주저앉아버린 관성의 실패담이 순간의 메아리처럼 스치고 지나간 저의 공간에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람에게 위로금 봉투처럼 전달해주곤 하던 아무개라는 기표조차 빨아들여 소멸시키는 진공만이 불길한 미소를 지으며 떠다니고 있을 뿐이에요. 여기가 어딘지, 오늘이 몇일인지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도록… 그런 진공의 공간에서 우주복도 헬멧도 없이 앉아있던 저는, 간신히 바닥에 짧아서 새끼 손가락으로조차 부여잡기 어려운 카펫털을 손 끝에 핏기가 허옇게 사라지도록 움겨잡고 앉아 있다가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진공세계만을 골라 떠돌아다니다가 이 공간으로 흘러들어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수박을 닮은 열매 하나를 파 먹기 시작하겠죠. 쓰디쓴 껍데기를 다 파 헤치고 나면, 반드시 그 달디 달기로 소문난 과육이 나온다는 그 열매… 그러나 저의 열매는 박치기 공룡의 머리를 닮았는지, 아무리 파헤치고 또 파헤쳐도 이쪽의 쓰디쓴 껍데기를 지나 저쪽의 쓰디쓴 껍데기로 통할 뿐이에요. 아, 그러니까 이게 그, 사람들이 말하던 그 ‘인내’ 라는 열매의 본질이었나보네요. 기나긴 진공의 세월, 그렇게 내뱉고 싶었던 그 말이 목구멍을 용암처럼 뚫고 올라와도, 입술에 피가 철철 흐를때까지 깨물때마다 머릿속에 담아왔던 바로 그 말, 그리고 그 말이 결실이 된다는 그 열매는 결국 과육없는 껍데기 덩어리였던 것을, 왜 물이 ‘반 밖에’ 남지 않은 컵을 ‘반이나’ 남은 컵이라고 스스로를 속여가며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것인지, 풀죽어 앉아있는 환상을 발로 차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해서 물아봐야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놈 탓인 것 같으니까.
# by bluexmas | 2008/02/19 13:44 | Life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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