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쟁이 악단을 불러주세요
같은 자세로 일을 오래 하면 다리가 아픈게 정상인가요? 잘 모르겠지만, 비행기에 오래 앉아있거나, 의자에 오래 앉아서 일을 하면 무릎부터 그 아래 종아리가 너무 아플때가 있어요. 그래서 열 시 반을 넘기지 못하고 퇴근… 또 술 생각이 나서 와인을 두 병 사들고 집에 왔으나 따기가 귀찮아서 먹다 남은 다른 걸 그냥 대충 마시고 나니 벌써 열 두시가 넘었군요.
사실은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담는 걸 무척 싫어하는 편이에요. 왜 그런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정말 바쁜 사람은 누구에게 티 내듯 바쁘다는 말 자체를 안 할거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여태껏 알아왔던, 정말 바쁘다는 말을 버릇처럼 입에 담고 사는 사람들 가운데 정말 바빠보이는 사람들은 없었던 것도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 사람들은 그냥, 관리를 못 해서 바빠보였거든요. 그런 생각을 했었죠. 그렇게 바쁘면 일하다 말고 어디 나가서 밥 한 시간씩 들여 먹을 여유도 없어야 되고, 점심 시간에 일어나서 학교를 가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일하고 들어와서 텔레비젼 서너시간 보는 것 또한 말이 안 되는 거라고… 정말 바쁘면 (그래서는 절대 안 되지만) 밥을 굶어야 되는 상황이 닥칠지도 모르고, 잠을 거의 못 자는 경우도 있을테고… 하여간, 어쩌면 바쁘다는 상황 역시 개인의 역량에 달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거죠, 말이 쓸데없이 길었지만.
어제는, 늦게 들어와서는 잠을 억지로 참아가면서 DVD를 보는 난리를 피워야만 했죠. 일주일 전에 공짜 쿠폰으로 인디아나 존스의 첫 번째 DVD를 빌렸는데(5월에 할 네 번째 편을 위한 이른 복습이죠. 개봉에 가까워지면 다 나가거든요), 설마 볼 시간이 없을까 했는데, 정말 볼 시간이 없더라구요. 그러나 그냥 돌려주기는 너무 억울해서 졸음을 막 참아가면서 봤죠. 물론 그만큼 재미는 있었지만, 정말 이게 뭐하는 짓일까, 하는 생각은 좀 들더라구요. 또 아침에 일부러 비디오가게까지 차를 몰고 가서 돌려주기까지…
하여간, 그렇게 길지는 않은 직장 생활 가운데 가장 바빴지만 또 그만큼 의미도 있었던 기간의 끝으로 다가가고 있어요. 아직 하루가 더 남았기 때문에 뭐라고 떠들어 댈 상황은 분명히 아니지만, 지금의 이 상황이 전환점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마감을 지나고, 또 주말을 보내고 나면 여태껏 회사에 다녔던 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 또 주말 내내 제대로 벗겨본 적 없는 허물을 억지로 벗어야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난주에 싸구려 커피 메이커를 사서 계속 커피를 내려 마셨지만, 내일 아침에는 늘 가던 가게에 들러 에스프레소 따따블샷을 마시고 출근할 생각이에요.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일찍 퇴근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어차피 다들 퇴근하고 난 뒤 조용히 퇴근하는 상황이라면 뭐 25일 연속 출근 기념 축하를 위한 출장 난쟁이 악단이라도 불렀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금요일 저녁 아홉시쯤, 28층에서부터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다다르면 엘리베이터 문부터 건물 출구까지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지만 깨끗하게는 빨아놓은 새빨간 카펫을 깔아놓고 열 두어명쯤으로 이루어진 난쟁이 악단이 기다리고 있는거죠. 그저께 고장나서 저를 잠시 가둬두었던 얄미운 엘리베이터가 그 경쾌한 띵, 소리를 내면서 1층에 다다르면, 아주아주 오래 기다렸다는 듯 ‘Congratulation’을 연주하기 시작하고, 제일 나이가 많은 악단의 단장 딸이 수줍은 얼굴로 화환을 들이일면, 저는 아마 무릎을 꿇고(난쟁이는 키가 작으니까-) 화환을 받겠죠, 그것도 목으로… 그리고는 그렇게 깔린 빨간 카펫을 따라 밟으면서 퇴근하는거에요. 제가 학생때부터 늘 밤을 샐때면 어디에선가 나타나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와주곤 했던 난쟁이들은, 그 기나긴 야근의 나날들이 일단락 지어진 것을 축하해주기 위해 경쾌한 곡을 쿵작쿵작 연주해주지만, 언제나 그렇듯 속으로는 울고 있노라고, 나중에 가서야 얘기해줄거에요. 우리, 이제는 이런 일 따위 축하해주러 나타나고 싶지 않다고 덧붙이면서. 2월도 어느새 3분의 1이 지나가고 봄이 찾아오는데, 이딴 일들 말고 조금 더 밝고 행복한 일을 축하해주고 싶은데… 뭐 그러나 별 수 있나요. 일단은 이틀씩이나 되는 주말 내내 쉴 수 있다는 것에나 감사하며 그 다음 일은 다음에나 생각하겠다고, 그 바쁜 시간 쪼개서 나와준 난쟁이들을 일일히 한 번씩 쓰다듬어주고 퇴근하는 수 밖에. 있잖아요. 건물 밖에까지 나올 필요는 없어요. 그럼 다들 놀러가다 말고, 아니 저 인간은 겨우 25일 정도 휴일 없이 일했다고 저렇게 난쟁이들까지 불러서 요란 법석을 떨어댄다고 한마디씩들 해댈테니까.
그러니까 악기 챙겨가지고, 오늘은 그냥 조용히 집에 돌아가세요. 청소가 다 끝나면 그제서야 집으로 초대할테니 저녁이나 같이 먹도록 하고…
# by bluexmas | 2008/02/08 14:47 | Life | 트랙백 | 덧글(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