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시간의 잡담
쉬는 시간이에요. 회사거든요. 넓고 넓은 사무실에는 저 밖에 없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작업을 하고 있죠. 토, 일요일에도 나왔고 오늘도 늦게 들어갈 것 같은데 그래도 기분은 그렇게 나쁘지 않네요.
사람들이 건축회사에 다닌다고 하면 대부분 매체에서 보아왔던 근사한 건물을 디자인하는 회사에 다니고 또 하는 일도 예전 광고에 나왔던 사람들(그 가운데 한 분은 제 과동창의 아버지… 모모 경기장도 디자인하셨죠)처럼 돌돌 말린 트레이싱지 펼쳐 놓고 생각에 잠겨 있는 표정을 보이다가 굵은 마카로 선 몇 개 슥슥 긋고 또 생각에 다시 잠기고… 하는 디자이너일거라 생각하기 쉬운데, 솔직히 그건 저 같은 보통 건축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 처하게 되는 상황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요. 저는 회사에 다닌지 이제 만 3년이 거의 다 되어 가는데 많고많은 이유들로 소위 말하는 디자인과정에 거의 참여해본 적이 없어요. 그러다가 몇 달전에 아주 짧은 프로젝트에서 잠깐 뭔가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안 해서 학교에서 나름 제 것으로 만들었던 과정과 방법에 대한 감을 찾지도 못하고 또 긴장도 하는 바람에 아주 말도 안되는 걸 끄집어 내어놓고는 한참동안 쪽팔렸었죠.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에요. 하지만 지난번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거의 첫 번째라고도 할 수 있을거에요.
글을 쓰던, 노래를 만들던, 그림을 그리던 아니면 심지어 건축을 하던 백지상태에서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걸 만들어 내는 과정은 정말 두려움 투성이에요. 일단 존재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시작점이 어디여야 되는지 몰라서 두렵고, 간신히 그 점을 찾아서 뭔가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 나가노라면 이게 또 정말 내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처럼 완성될지 몰라 두렵고, 또 그렇게 완성되었다고 해도 그걸 사람들 앞에 내어놓아서 검증 내지는 평가를 받으려면 또 두렵죠. 이를테면 가장 주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생산해내는 것으로 어느 정도만큼의 객관적인 지지 내지는 인정을 받아야하는 그 모든 일들은 참으로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 같더라구요. 네, 그래서 지금도 두려워하고 있어요. 게다가 너무 오랜만이라서, 또 사람들은 너, 꼭 이번에 너의 능력을 보여줘야만 한다고 말하고…
돌아보면 까마득한 시간이 지난 것 같아요. 스물 하나, 둘이었던 시절 학교에서 밤을 새던 날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뭘 만들어냈는지도 지금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와, 내가 지금 이걸 진짜로 하게 되었구나, 그 모든 안 된다고 말하던 사람들의 말을 뒤로 하고… 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기만 했던 시절. 이러한 마음으로 평생 이걸 하면서 살아야 되겠다고 마음먹었던 시절… 언제나 현실은 이상의 거짓말쟁이 도플갱어라서 결국 제 자리는 2주마다 급여 받으면 기뻐하는 평범한 월급쟁이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이런 일을 하고 있으면 뭐 예전 어느 시절 가지고 있던 열정이 되살아난다, 라는 거짓말은 차마 낯 뜨거워서 할 수 없을지라도 기분은 좋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너무 두렵지만, 이 기분 그래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 by bluexmas | 2008/01/29 12:02 | Life | 트랙백 | 덧글(6)
비공개 덧글입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어쩜 이렇게 잘 표현해 놓으셨는지…
과로에 심신은 약간 지치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살짝 갱생하고 있는 열정의 끈을 놓치지마시고, 뻔쩍뻔쩍 멋진 산출물을 내놓으시길 바래요~
비공개님: 거기는 아직도 많이 추워서 그럴거에요. 저는 감기는 이미 걸리고 넘겨서 괜찮을거라고 믿어요. 그럼요, 좋아하는 일도 직업으로 삼기 힘든데…사실 저는 진짜 좋아하는 일은 직업으로는 안 가지려고 해요. 하고 싶을때만 하게요.
erasehead님: 그렇게 봐주시면 저야 고맙죠^^ 뭐 그냥 회사에 있다가 잠시 쉬고 싶을때 썼어요^^
conpanna님: 에에이, 민망하게 축하는요… 저의 열정은 좌절중독이라 재활중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