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면 납골당

예고되었던 대로, 금요일엔 회사의 도면 창고로 출근했죠. 처음 가보는 길을 약간은 불안한 마음-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으로 운전해 가면서 얼핏 ‘아프리카의 끝(Finis Africae)’ 생각이 나더라구요. 처음으로 에코의 책을 읽었던게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지 대학교 1학년이었는지 지금 아주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정말 아주아주 오랜만에 밤을 새우다시피 했던 기억은 아직도 뚜렸해요.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서 모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부분을 읽으면서는 정말 문장을 따라 읽으며 머리속으로는 이미지를 그리고 있었죠. 번역본이긴 했지만 읽으면서 뚜렷한 이미지를 그릴 수 있는 책은 그게 처음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하여간 그 책을 읽고 저자 에코와 역자 이윤기 둘 다에게 빠져서 몇 년을 보냈는데, 에코의 소설은 이윤기가 번역 안 해서 번역본으로 안 읽기로 했는데 정작 이윤기는 또 책마다 똑같은 얘기만 해서 읽기를 그만둬버렸죠. 요즘도 그러시나 모르겠네… 신화 아니면 미국 살면서 보고 느꼈던 얘기들, 또 소설을 써도 미국에서 공부 내지는 교환 연구원(완전 작가 본인이죠)으로 살면서 또 신화를 들먹이고… 다섯 권 정도까지는 ‘와, 이 양반 아는거 진짜 많네’ 라는 기분으로 읽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야, 니들 이거 모르지, 한 번 잘 좀 들어봐’ 와 같은 훈계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읽기 싫어지는.

어쨌거나 문서를 보관하는 곳에 간다니 뜬금없이 아프리카의 끝이 생각 났는지도 모르겠지만, 너무나 아쉽게도 회사의 도면창고는 아프리카의 끝보다는 생지옥의 시작과 같은 곳이었죠, 수십년 된 도면들이나 딱히 버릴 수 없는 문서들이 보관이라는 그럴싸한 단어의 가면과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거의 버려져 있는 쓰레기장 같은 곳이니까요. 그리고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납골당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게 사실이에요.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길게 늘어선 복도에 서류를 담은 골판지 상자와 둘둘 말은 도면을 담은 튜브들이 쌓여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얼핏 보아서는 원하는 도면을 찾을 수 없죠. 목록을 들여다 볼때까지는… 그러니까 모두 익명의 이름으로 머물러 있는 것조차 어찌보면 납골당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사실 이름이 어떻게든 붙어 있지만 모두 크기와 형태가 같아서 바로 찾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도면들은, 낱장으로 놓았을 때는 그저 찢어지기 쉬운 종이, 피부와도 같지만 둘둘 말아 놓으면 마치 등뼈라도 된 것처럼 딱딱해져서 어쩌면 그 기분마저 약간 억지를 보태어 뼈를 보관하는 느낌과 비슷할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억지를 보태자면…

하지만 유골을 보관하는 납골당과 이 도면 납골당에는 아주 큰 차이점이 있죠. 진짜 납골당엔 자기 차례의 삶을 마치고 한 줌 재로 남은 사람들이 보다 많은, 아직도 유통기한이 남은 사람들이 찾아와 자기들을 기억해주기 바라지만 도면들은 사실 주인이 찾아와서 자기를 그 길고 긴 잠에서 깨워주기를 바라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건 바로 자기들을 바탕으로 지어진 건물들에 문제가 생겨서,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그려준 주인이 곤경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상황을 암시하니까요. 그러니까 사실 회사에서도 지은지 수십년 된 건물의 도면들을 좋아서 이렇게 건물까지 세내서 공간을 마련해 보관하는건 아니죠. 정확한 수자를 내놓기는 저도 어렵지만 도면들은 법으로 정한 기한 이상 보관되어서 나중에 건물에 문제가 생겨서 책임추궁을 해야될 때 자료로 쓰여져야 하거든요.

하여간 이렇게 길고 긴 복도에, 도면들은 익명과 무표정으로 일관한 채 누워있었고, 저는 이런저런 물건들을 옮기고 앵글을 조립하고, 길쪽으로 나 있는 창문들을 종이로 가리고… 그렇게 하루를 보냈죠. 사무실에 안 있으니까 마음은 편했지만, 무슨 대기발령도 아니고 사람들을 여기에다 보낼 정도면 우리 회사는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라는데 생각이 미치니까 결국 불편한 기분이 들더군요.

납골당 얘기를 하다보니 진짜 납골당이 생각나서 작년 서부 여행때 찍은 사진을 뒤져봤죠. 여기는 LA 시내의 The Cathedral of Our Lady of Angels라는 성당인데, 1996년 프리츠커 상 수상에 빛나는 Rafael Moneo가 디자인해서 가봤더니 지하에 납골묘 Mausoleum가 있더라구요. 뭔지도 모르고 한참 돌아다니고 보니 그렇더라고…사진 찍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서 그랬는지

몇 장 찍지도 않았고 다 그저 그렇네요. 요즘 사람들은 흙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이런 데에 있으면 기분 썰렁하지 않을까요?

 by bluexmas | 2008/01/21 17:00 | Life | 트랙백 | 덧글(5)

 Commented by 보리 at 2008/01/22 01:54 

정말 납골당과 비슷한 면이 있네요?! 한국에서는 화장한 뒤 강물이나 산에 뿌려지는 것이 정석(?)인데 미국은 많이 다른 듯해요. 유골함에 보관되어져서 이런 납골당이나 아니면 벽난로 위 장식으로… 저라면 그냥 들과 산에 뿌려져서 훨훨 날아다니고 싶을텐데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1/22 11:55 

그렇죠? 솔직히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든 상관은 안 하는데, 굳이 저런 곳에 있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아요. 사라지면 사라지는 거죠 뭐… 육체는 숨이 붙어 있을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 가기 전에 장기 기증도 하고 가야 되지 않을까 종종 생각해요. 아직 등록은 안 했지만…

 Commented at 2008/01/23 12:1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8/01/23 22:0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1/24 12:09 

비공개 1님: 옆 복도는 싹 치워서 뛰어다니기 좋았어요^^

비공개 2님: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