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심해
이제는 감기도, 또 전반적인 이곳에서의 생활도 다시 안정을 찾아가는 듯, 돌아온지 거의 열흘만에 평소에 하던 정도의 70% 수준까지 운동을 할 수 있더라구요. 여전히 콧물을 찔찔 흘리고 있어서(명찰 대신 명함과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출근할까 아침에 진지하게 고민했죠, 콧물 닦으려구요-_-;;;) 달리기를 하다보니 숨을 쉬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럭저럭 20분도 채우고, 간략하게나마 웨이트 트레이닝도 소화하고, 마무리 운동격인 1마일 달리기와 턱걸이까지도 그럭저럭 끝내고 나니 한참동안 칙칙했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었지요… 아마도 이제서야 저의 몸과 마음이 전환점을 돌고 있는 것일까요?
뭐 그렇게 자주 나가지는 않아왔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정도의 기분을 느껴본 적은 없는데, 이번엔 정말 이상하게도 가서는 거기에서, 또 돌아와서는 여기에서 한참동안이나 적응을 하지 못하는 그런 느낌이에요.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MSX 방식의 컴퓨터가 대우에서 선을 보이던 1987년 즈음에는 텔레비젼이 아니면 녹색 한 가지만으로 글과 그림이 나타나는 전용 모니터가 컴퓨터에 딸려나왔었는데, 이 모니터로 그 당시 유행하던 오락 ‘메탈 기어(나중에 다른 플랫폼으로도 이식되었죠?)’를 하다보면 지뢰를 놓고 다니는 솔리드 스네이크의 녹색 잔상이 유난히도 길게 남던 것이 기억나는데, 마치 그런 느낌이었어요. 계속해서 오랜 습관이 만들어 놓은 행동지침에 따라 움직이고는 있지만 그 잔상이 유난히도 길게 남아 나를 잡아 끄는 듯한 그런 느낌, 그리고 그런 느낌이 오래되다보면 결국 멍해지고, 이것은 혹시 서로 다른 공간을 왔다갔다하면서 얻는 일종의 잠수병 때문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죠.
처음 편도 비행기표를 끊어 아틀란타라는 섬으로 도망쳐왔던 2002년 7월의 어느 날, 이렇게 기나긴 비행을 멈춤없이 하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저는 혹시 이렇게 하게 되는 장거리 여행이 실은 비행기가 아니라 어떤 터널 같은 것을 통과하는 종류의 것은 아닐까, 잠깐 멍청한 생각을 했었어요. 뭐 이륙하고 곧 밥 주고 나면 창문도 다 닫으라고 하니, 정말 알게 뭐에요, 날아가는 척 하다가 어두컴컴한 어딘가로 꾸역꾸역 들어가는지… 그러다가 목적지에 거의 다 와서 창문 열때가 되면 또 살짝 나는 척 했다가 착륙하고… 하여간 정말로 그렇게 여행을 해야한다면 뭐 어두컴컴하니 심해로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바다 깊이 수직방향으로 깊게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대부분 경도를 바꾸는, 그러니까 수평방향의 여행을 하게 될테니 이걸 수평심해라고 불러도 될까, 라는 생각까지만 했다가 아마 잠에 빠져들었을거에요. 공짜로 주는 와인이며 양주 따위를 촌놈처럼 미친듯이 들이키고서… 물론 일어나서 얻는 두통은 말해봐야 입만 아픈거구요, 아니, 머리가 아픈건가 두통이니까…
하여간,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런 수평심해가 정말로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지… 하지만 있다면 아마도 여행의 끝에는 감압실을 단계적으로 거치는 적응기간이 필요하겠죠. 아무리 수직방향의 고도차가 가져오는 압력의 차이가 없다고 해도, 그 수평심해의 끝과 끝에 존재하는 장소들이 서로 저 같이 그 두 장소 어딘가에 속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한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각각의 끝을 열심히 열심히 빨고 있을테니 그 가운데 엉거주춤하게 있는 저는 몸안에 지니고 있는 공기를 빨려가며 말라 비틀어지고 있는지도 모를 노릇이죠. 쭉쭉쭉, 소리를 내면서 볼 살이 점차 쪼그라드는(표현력이 빈약하니 시각적 상상력을 한 번 발휘해보세요)… 아니 뭐, 그게 설사 사실이라도 해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육체적, 정신적 징후를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참으로 심각해서 회사도 빠지고 집에서 쉬는 바람에 가질 수 있었던 3일간의 긴 주말에 그렇게 잠수 이후 감압실에서 격리되듯 스스로를 격리시켜야만 했으니 대체 무슨 일들을 겪고 온 것인지도 이제는 정말 아스라한 느낌일 뿐이에요. 어쨌거나 침대에 누워 자다깨다를 반복했던 2일하고 반나절이 지난 일요일 오후, 드디어 날씨는 따뜻해졌고 저는 창문을 열어 소환신호에 응한 저의 조각들을 열심히 주워 담았어요. 그제서야 창문을 열어 대기압과 집의 기압을 맞추게 된 것이겠죠. 그리고는 미리 말해두었던 것처럼 다시 창문을 닫아 아직도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조각들에게는 작별인사를 고했구요. 간신히 아직도 잔상을 끌고 다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여행의 흔적을 온몸으로 부둥켜 안고 있는 두 개의 트렁크를 비우고 나니 창 밖으로 지는 해가 보였지만, 그 지는 해를 보고나서야 그렇게 떠돌아 다니기만 했던 제 의식의 해가 떠오르더군요. 마치 그렇게 늦은 등교시간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각을 밥먹듯 했던 오후반 학생 이 아무개처럼.
# by bluexmas | 2008/01/10 12:41 | Life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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