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카레

사실 ‘그 남자의 카레’ 라는 제목은 제가 해준 카레를 먹고 제 친구 녀석이 자기 싸이홈피에 사진을 올렸을 때 썼던 제목이었죠. 1999년이었나, 자취생활 3년째를 맞아 저는 학교에서 조금 멀리 떨어졌지만 덕분에 무지하게 큰 자취방-이라기 보다 거의 집-을 가질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가진 여유있는 공간에 가끔 친구들을 불러 밥을 같이 먹거나 술을 마시곤 했죠. 그리고 카레는 아마 처음 친구들을 불렀을 때 그 식탁의 주연배우였을거에요. 일품요리인데다가 만들기 쉽고 실패할 확률이 적은 음식들 가운데 하나니까요.

학교 바로 뒷쪽의 말도 안되는 원룸에서 살다가 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준비를 한답시고 1년 동안 놀기로 하면서 집을 마장동 축산물시장 입구로 옮겼는데, 이 집은 사실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면 익숙해지기 무척 힘든 냄새와 무수히 많은 가게들의 더 무수하게 많은 냉장고의 컴프레서가 내는 소음이 만만치 않아서 그렇게 살기 편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혼자 살기에는 워낙 넓었고 또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한 작업 공간을 꽤 넉넉하게 가질 수 있어서 저로서는 별로 불만이 없었죠. 전에 살던 원룸과 같은 가격의 전세였으니까요. 거기에다가 주인집이 1층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건물 2층에 집이 있어서 여러모로 편하기도 했죠. 라면사러 가기에도 좋고… 아, 이 마장동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이 되면 꼭 다시 써 보고 싶네요(이렇게 벌려만 놓고 메아리가 없는 얘기들이 이제는 꽤 많을 것도 같네요-_-;;;).

하여간 그날은 4월 정도의 초봄, 그래서 따뜻한 토요일 오후였으니 시장도 대충 파해서 방 앞의 창문-도로 쪽으로 난-을 활짝 열어도 냄새나 차소리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저는 지하철로 두 정거장쯤 떨어져 있는 아파트 단지에 있는 엘지마트에서 장을 봐다가 카레를 만들었고, 이런저런 이유로 그 때까지도 학교에 남아 있던 친구 두 녀석이 찾아와서 같이 저녁을 먹고 제가 사온 싸구려 바카디에 콜라를 섞어서 마시다가 제가 먼저 나가 떨어지는 바람에 친구들은 아마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집에 가야만 했을거에요. 아주 가끔 사람을 불러 놓고 먼저 나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고 나면 새벽이나 아침에 일어나서 굉장히 민망하거나 쓸쓸하더라구요.

어쨌거나 카레는 그 모든 음식들이 만들기 싫어지거나 어느 순간 음식 만들기가 슬럼프의 외나무 다리 위를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때면 마치 초심으로 돌아가려는 듯한 마음으로 만들게 되는 음식인데, 미국에 살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오랜동안 애용해왔던 오뚜기로부터 등을 돌리고 일본 S&B의 카레를 애용하고 있죠. 이번 주말은 정말 슬럼프가 어찌나 심하던지, 이 카레조차도 별 맛이 없더라구요. 감기 때문에 아예 입맛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르지만. 

 by bluexmas | 2008/01/07 14:13 | Life | 트랙백 | 덧글(8)

 Commented by 笑兒 at 2008/01/07 16:49 

감기때문에 일시적인 현상인것일거에요!

저도 이번 방학에 카레 해먹고 싶었었는데 -_ㅠ 다른 음식 먹는데 급급하여;;

 Commented by zyoun at 2008/01/07 17:30 

앗. 저도 지난 주말에 S&B 카레를 끓였는데! 어쩐지 너무 묽어져서 실패작이었어요.(사람들까지 불렀었는데!!)

 Commented at 2008/01/07 22:1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8/01/07 23:5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1/08 12:45 

笑兒님: 저도 그렇게 믿고 싶어요. 봄도 아닌데 봄나물 타령도 할 수 없고…

zyoun님: 그럴때는 카레 가루(또는 블럭)을 더 넣어주시거나, 최악의 경우 밀가루, 쌀가루, 옥수수 녹말가루 등등의 전분으로 점도를 맞춰주시는 것도 방법이에요. 무작장 끓이면 나중에 건더기가 완전 흐물거려서 소 여물처럼 되거든요(그나저나 덧글은 처음이신 것 같은데 자주 들러주세요^^)

비공개 1님: 사실 어머니가 하시는 것처럼 모든 야채를 다 같은 크기로 썰어야 되는데,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그렇답니다. 특별히 당근을 싫어하지는 않아요^^

비공개 2님: 앗, 그렇게 슬픈 소식을 들려주시다니 너무 마음이 아파요. 얼른 기운 내셨으면 좋겠어요^^

 Commented at 2008/04/26 11:4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4/26 12:30 

어라?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거냐? 소식을 알려다오, 소식을…

 Commented at 2008/04/27 02:45  

비공개 덧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