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다시 떠나요
여행을 와서 잠을 잘 못 자다니 저라는 인간도 참으로 구제불능인가봐요. 일곱시 조금 못 된 시간에 일어나서 주섬주섬 짐 챙기고, 노트북에 사진 복사해 놓고, 로비에 내려가서 아침 먹고 올라와서 먹다 남은 우유, 요거트, 딸기, 그리고 섬유질을 보충할 생각으로 함께 사다 놓은 상추까지 씻어서 우적우적 먹고는 배가 불러서 밍기적거리고 있습니다. 곧 일어나서 컴퓨터를 꺼서 트렁크에 담고, 샤워를 하면 이제 또 다시 떠날 준비가 되겠죠.
언제나, 정말 언제나 그렇듯이 여행에서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책이나 지도 등등의 관련 정보를 펼쳐 놓으면 늘 그렇듯이 모든 가야만 될 것 같은 곳들이 바로 한 두발짝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서, 계속 걷다보면 멈추지 말고 어딘가 가고, 또 보아야만 할 것 같은 강박증에 시달리곤 했죠. 거기에다가 ‘내 일생에 여기를 다시 안 오게 될지도 몰라’ 라는 생각마저 겹치면 걷고 걷고 또 걷다가 더 이상은 걸을 수 없는 절벽을 만나면 바다로 뛰어든다는 누구누구처럼 돌아다니던 시절도 있었다는거죠.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고 싶지 않더라구요. 여행이 뭐 각 장소에 대한 출석점검도 아니고, 누군가한테 ‘아, 나 여기랑 저기, 그리고 거기도 갔다왔어’ 라고 자랑할 건덕지를 쌓으러 다니는 건 더더욱 아닐테니까요. 여행은 말 그대로 여행이 아닐까 싶어요. 어차피 우리는 살기 위해 그 도시를 가는게 아니니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저 며칠 동안을 어느 장소 또는 공간에 머무르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짊어져야만 하는 의무 따위를 애써 무시한 채 그저 자기 눈에 들어오는 것들만을 담아 좋은 기억만을 담아가려고 여행을 떠난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틀동안 머무른 시애틀에서 하루는 맑았고, 하루는 비가 왔었다고 글을 써서는 ‘아, 역시 시애틀의 비는 뭐랄까 사람의 마음을 운치있게 가라앉히는 아우라가 있는 것 같아’ 라고 말하는 건 결국 남은 이백 몇 십일, 아니면 적어도 겨우내내 내리는 비에 지치고 또 지친 그 동네 사람들의 마음 따위를 읽어주는 것은 아닐테니까요. 뭐 사실 생각해보면 꼭 그래야 될 필요도 없긴 하지만, 언제나 우리가 가게 되는 그 곳은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그 곳과는 어쨌거나 다른 종류의 것이 아닌가, 하는게 제가 여행에 대해 가지는 기본적인 생각이에요.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해서 대체 뭐가 달라질까요…? 뭐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 여행은, 적어도 저에게는 총체적인 감정의 덩어리로 기억되는 것이라는 정도는 말할 수 있을까요? 뭐 가본 장소도, 맛있게 먹었던 음식도, 만났던 사람 등등의 자질구레한 장면들도 기억나겠지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날아가버리곤 하는 그런 자질구레한 기억들을 털어버리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단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총체적인 무엇인가와 같다는 것이죠. 온갖 미묘한 색깔과 붓터치의 기법 등등이 하나로 압축된, 그래서 이렇다 저렇다 자질구레한 설명을 덧붙이기보다는 두어 발짝 떨어져서 그냥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게 더 나은 그런 기억…여행이 즐거운 종류의 것이었다면 그저 계속 미소를 짓고 있겠죠, 때로는 아무도 모르게 살짝.
역시 아침이라 생각이 그다지 질서정연하지 못하네요. 열 시까지 방을 비워줘야 되는데, 삿포로 맥주 공장에라도 가봐야 되는 걸까 생각하다가, 짐 맡기기 귀찮아서 그냥 지하철로 두 정거장 떨어진 역까지 걸어가기로 마음 먹었어요. 이런 좋은 장소, 저런 맛난 음식 다 좋은데 그냥 돌아다니면서 예쁜 간판이나 이상하게 옷 입은 여자들 등등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으니까요. 에어콘과 히터, 그리고 뜨거운 김이 나오는 가습기를 같이 틀어놓고 앉아있으려니 왼쪽 머리는 차갑고, 오른쪽 어깨는 뜨겁고, 등짝은 건조한게 요즘의 제 마음과 너무나 비슷하네요. 이제 돌아가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는데 저는 또 어떤 기억을 챙겨서 돌아가게 될까요? 사실은 아직도 떠나는 날 아침에 볶음밥 해 먹고 가스불을 완전히 껐는지 약간 궁금해하고 있어요.
그러나 곧 또 다시 떠나게 될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by bluexmas | 2007/12/24 08:42 | Life | 트랙백 | 덧글(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