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말해요
영어권 국가에서 어떤 이유로라도 장기체류한 경험이 있다면 누구라도 가지고 있을법한 영어에 관련된 골때리는 얘기들을 가지고 있죠. 많고 많은 저의 관련 이야기책에서 끄집어낸 두 이야기.
1. 이건 아마도 저를 예전부터 알았던 사람이라면 듣고 듣고 또 들었던 얘기라서, 그 사람들에겐 미친놈 또 똑같은 얘기 한다는 반응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또 하고 싶네요.
2002년 여름, 대학원을 위해서 미국에 건너왔고 8월 중순, 개강을 앞두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던 날, 혹시라도 한국사람은 없나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있었습니다. 대체 누구였을까… 기억을 열심히 더듬어보니, 초등학교때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던 남자애(편의상 ㅅ이라고 하죠)더라구요. 저는 학군과 전혀 상관없이 초중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천 몇 백 세대가 사는 아파트단지에 살면서도 친구는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었지만, 그 친구와는 어떻게 약간 가까워져서 집에도 몇 번은 왔다갔다 했던터라 기억을 할 수가 있었죠. 언젠가 캐나다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다시 돌아온 듯한 모양이었구요. 그래서 저는 그에게 다가가서 아는 척을 했죠. 처음에는 기억을 잘 못하는 것 같길래, 어머니가 피아노학원-아파트단지 상가에 있는 피아노학원을 오래 운영하셨거든요. 그래서 저는 피아노 학원집 아들이었고 얼굴이 그럭저럭 알려진 덕분에 동네 오락실은 절대 못 가고 늘 학교 근처에 있는 곳들만을 애용했다는…-을 하셨다고 그랬더니 그제서야 기억을 하더군요. 뭐 사실 아주 친하게 지낸 아이도 아니고 해서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 벌쭘하게 면담차례만을 기다리는데, 그 녀석이 얘기를 꺼내더군요.
“야, 우리, 미국에 공부하러 왔는데 영어도 늘겸 영어로 얘기를 하는게 어때?”
“-_-;;(What the F##k?)”
보니까 그 녀석은 같이 온 다른 여학생과 벌써 달콤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그 여학생과는 영어로 얘기를 주고 받더군요(결국 둘은 결혼했습니다…). 뭐 미국에 갓 온 제가 영어를 잘 할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한국사람들끼리 영어로 얘기를 한다고 늘지 않는다는 정도는 아는 터, 그렇다고 해서 낼름 대놓고 하고 싶지 않다는 대답은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 싫어도 없이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리고는 기회가 있을때마다 그냥 우리말로 얘기를 했죠. 이것이 저의 우회적인 거절임을 알아차려주기를 바라는 순진한 마음과 함께.
그리고 어째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아 꼭 필요한 말만 *우리말로* 건네고 지내기를 일주일, 드디어 학기가 시작되어 숨가쁘게 학교에 적응하는 와중에, 이 ㅅ이 저를 보자더군요. 그리고는 대뜸 하는 얘기가,
“야, 우리가 공부하자고 영어로 얘기하는데 너는 자꾸 한국말로 얘기하니까 방해되잖아.”
“-_-;;;(What the F##k?)”
지금도 성질이 그다지 착하지 못하지만, 그때는 더 싸가지 없었던 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참을 들이대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여러가지 골때리는 일들이 새로새록 벌어져서 학교를 떠날때까지 그다지 얘기도 하지 않고 지냈죠. 그랬더니 언젠가는 저보고 영어 잘 하려고 미국애들이랑만 어울려 다닌다고 그러더군요. 네, 제가 좀 그랬죠. 한국 사람들끼리는 촌스러워서 영어로 얘기 안 하고, 미국애들한테 굽신거려서 영어 좀 잘 해보려구요. 그래서 영어 좀 늘었죠, 6년 동안 살면서.
2. 이것도 기억을 더듬어보니 같은 학기에 벌어진 일이네요. 건축 이론/비평 수업을 들으면서 시험을 대신한 발표를 하게 되었는데, 발표의 큰 주제는 수업시간에 다룬 현대 이전의 건축이론과 교수가 제시해준 현대건축물을 짝지어 현대이전 건축이론이 제시한 원형이 고른 현대건축물에서 어떻게 변형되었나를 비교/분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프랑스의 Marc-Antoine Laugier의 An Essay on Architecture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축가들 가운데 하나(내지는 둘?) 인 일본의 카즈요 세지마(이게 성인가요? 여기에서 늘 영어로 된 이름만 접해서…제가 무식한거죠-_-;;;)의 아파트를 골랐고, 시간을 들여 비교/분석을 했습니다(어떻게 했는지 써 볼까 잠시 생각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생략합니다-_-;;;). 그리고 발표 당일, 파워포인트까지 만들어 화면에 띄워놓고 입을 딱 떼려는 순간, 고개를 드니 저를 바라보는 십 여쌍의 파란 눈들이 그대로 저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더군요. 그럴때를 대비해서 미리 비상원고를 써 놓았어야 했는데, 그게 귀찮다기보다 그냥 너무 싫더군요. 그래서 이번엔 애드립이다! 를 부르짖고 무대로 뛰어들었는데, 결국 참혹하게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10분 동안 저는 거의 반벙어리가 되어 열심히 파워포인트만 넘겼습니다. 차라리 파워포인트가 무슨 책이었다면 그 소리라도 들렸을텐데, 저는 억울하게 꿀도 못 먹고 벙어리가 되었고 파란눈의 아이들은 쟤는 또 왜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냐며 지들끼리 쑥덕거렸죠.
* * * * *
오늘 회사에서 워크샵이 있어서 오후 내내 조별과제를 했는데, 발표를 다 같이 조금씩 나눠서 하자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오랜만에 30초짜리 발표를 했는데, 조금 긴장했죠. 언제나 그렇듯 우리말이 아니라서 실수할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위에 주절거린 것 같은 기억들이 또 떠오르더라구요. 저는 사실 상당한 구세대로, 제가 ‘국민’학교 다닐때에는 영어 교육이라는 것도 없었고 게다가 지방이라 그런 것들이 더더더욱 없었지만 아버지한테 영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지금으로 치면 A2용지 정도 크기의 작은 칠판이 있었고,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그 칠판 앞에 앉아 아버지에게 영어를 배웠죠(물론 한자도 배웠습니다…). 그게 아홉살때였으니 전 모씨가 아홉시 땡치면 뉴스 첫 소식으로 등장하던 시절 시골구석에서 살던 것치고는 빨랐다고 할 수 있죠. 그 덕분이었는지, 저는 영어-를 포함한 말과 글-을 좋아했고 지금까지도 영어를 배우는데 어려움은 생각보다 없었던 것 같아요. 어릴때는 영어를 너무 좋아해서 꼭 영문과 같은데 간다고 했는데, 계속 공대를 가야된다고 세뇌되었던 탓에 그쪽으로의 진로는 생각해보지도 못했죠.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하여간, 6년전 처음 와서는 교수한테 질문도 잘 못했었는데(그 전인 1998년에 놀러왔다가는 아예 한 마디도 못하고 갔죠. 군대 가기전만해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가능했었는데, 막 제대후엔 완전 아메바로 퇴화되어서…) 뭐 이제는 회사도 다니고, 의사소통이 안되면 살아남을 수가 없으니 어떻게든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다는 느낌이에요. 언제나 똑같은 생각인데, 외국어를 말하는데 가장 중요한 건, 어휘도 발음도 아닌 억양인 것 같아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발성… 처음에 미국에 와서 제가 항상 우리말을 말할때 쓰는 목소리의 톤과 느낌으로 영어를 말하려니 저 자신도 말하기 어색하고 듣는 사람들도 괴로워하는 영어가 나오더군요. 그래서 한참 시행착오를 겪은 다음에 내렸던 결론인 즉슨, 영어는 우리말과 다른 발성으로 말해야 된다는 것… 그래서 목소리도 조금은 달라지고, 때로는 다른 음역을 쓴다는 느낌마저도 들때가 있어요. 텔레비젼을 보면서도 느끼는 건, 결국 가수 모창을 하듯이 저 미국놈들이 말하는 발성, 그 다음에는 전체의 억양을 따라할 수 있으면 그나마 조금 더 낫게 말할 수 있다는 생각뿐이죠. 어차피 단어, 혹은 어휘는 중학교때 배운 것만으로도 소화할 수 있으니까요. 뭐 회사에서도 쓰는 어휘/문구들 가운데 절반은 What’s up? 일텐데요 뭐.
아, 글을 마치려다가 기억을 더듬어보니, 초등학교 6학년땐가 학교에서 영어교육을 했었네요. 그 때 제가 다니던 백 년 가까이 오래된 초등학교에서 불이 나서 건물이 홀랑타고 교장이 직위해제되는 불상사가 있었는데, 그의 후임으로 온 장학사 출신의 대머리 교장이 ‘완전교육’을 부르짖으며 애들에게 영어교육을 시키겠다고 했는데, 그게 뭐나면 초급 영어 문장을 한글로 적어 가르치는 것이었죠. 그러니까 ‘This is a book’ 이 아닌 ‘디스 이즈 어 북’ 을 가르쳤다구요. 그걸로 내신에는 들어가지 않는 쪽지시험도 봤는데, 제가 싸가지없게도 다 아는 거라고 영어로 적어서 냈더니, 제 짝이었던 여자애가 선생님이 한글로 쓰라는데 그렇게 안 했으니 저는 빵점이라고 그랬어요. 뭐 저야 ‘국민’학생일때도 싸가지 없었으니 빵점 맞아도 쌌겠죠.
참, 저 ‘완전교육’을 부르짖던 대머리 이 모 교장 선생님과 관련된 아주 재미있는 얘기들이 많은데, 잘못하면 명예훼손 따위로 욕볼까봐 망설이는 요즘이에요. 그 양반이 자기 아들이랑 손녀끌고 백세 퀴즈쇼(다들 기억하시죠? 3대 나이를 합쳐서 그걸 기본점수로 삼는 퀴즈쇼…)에도 나와서 ‘완전교육’을 부르짖었었는데, 사실 그 뒷 이야기인 즉슨…
# by bluexmas | 2007/11/30 12:34 | Life | 트랙백 | 덧글(6)
말씀하신것처럼 같은 어색한 발음과 미국인에게 익숙하지않은 단어를 써도 억양을 확실하게 하는 동남아시아나 중국친구들말을 미국사람들이 훨씬 더 잘 알아듣더군요
blackout님: 동포들과 하는 것과 비교하면 당연히 늘겠죠. 전 뭐 늘 미식축구 얘기, 시덥잖은 농담…이런 것들만 해서요.
Josée님: “야, 우리가 공부하자고 영어로 얘기하는데 너는 자꾸 한국말로 얘기하니까 방해되잖아.” <—여기에 공감하시나요?
아니면,”-_-;;;(What the F##k?)”에?
HiME7519님: 동남아시아는 잘 모르겠구요, 중국애들은 대부분 자기 억양이 있어서 좀 그렇던데…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면 제일 잘 해요. 우리나라 말이 남의 나라 발음과 억양을 표현하는데 제약이 훨씬 적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