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없는 상처

언젠가는 보다 더 좋은 칼을 사리라는 작은 바램이 있긴 하지만, 현재의 자금사정으로는 그 정도까지 사기는 좀 무리인 것 같아서 일단 사격에 비해 성능비가 아주 좋다는 식도를 새로 장만하고, 원래 없던 작은 칼(Paring Knife)도 따로 샀는데, 두 칼 다 날카로움을 유지하기 위해 피를 원했는지 어제 오늘 손가락 하나씩 베어먹더군요. 생각보다 칼이 잘 들어서 깨끗이 베인 덕분에 그다지 통증은 심하지 않았구요(종이처럼 면이 울퉁불퉁한데 베면 더 아프죠. 날카로운 칼보다 잘 안 드는 칼에 베는게 훨씬 더 고통스럽구요).

뭐 직업이 직업인지라 학교 다닐때 모형만들면서 손 베는 건 뭐 거의 일상다반사였어요. 보통 사람들이 쓰는, 칼 날 끝이 60도를 이루고 있는 것들과는 달리 건축과에서 쓰는 건 끝이 30도로 훨씬 날카로운 것이었고 밤 며칠 새면서 이것저것 하다보면 손 정도 베는건 고통스럽지만 언제나 따르는, 성공적인 프리젠테이션을 위한 의식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요. 피를 바쳐 성공을 얻는… 가장 최근의 major blow는 미국에 와서 첫 학기, 중간 프리젠테이션을 앞두고 잠을 못 자면서 모형을 만들던 어느 날, 너무 급하게 칼질을 하다가 왼쪽 집게 손가락 끝을 잘라먹은 것이었죠. 다행스럽게도 그 때는 학교 healthcare center가 과 건물 바로 앞에 있어서 바로 몇 바늘 꿰매주는 걸로 처치를 했고, 손가락까지 잘라먹은 저를 불쌍하게 본 교수는 집에 가서 쉬라며 저를 일찍 집에 보냈죠.

심하게 베인 건 아닌데 살짝 옛날 생각이 나더라구요. 사실 부엌에서의 칼질 솜씨가 좀 늘었으면 좋겠는데 더 좋은, 그리고 잘 드는 칼을 써야 지금보다 더 빨리 느는건지 아니면 더 음식을 많이 만들어봐야 되는지 그걸 모르겠네요. 아니면 나무 도마를 써야되나(요즘은 대나무 도마를 가지고 싶어서 물색중이거든요. 대나무는 일반 나무보다 훨씬 친환경적이고 자라는 속도가 빨라서 여러 용도에 아주 바람직한 재료라고 하죠).

 by bluexmas | 2007/11/12 14:24 | Life | 트랙백 | 덧글(10)

 Commented by 잔야 at 2007/11/12 14:29 

앗 아파보여요 ㅜㅠ 전 papercut을 자주 입는 편이예요… 으으 칼이든 종이든 베이고 나서보다도 베일때의 그 오싹한 느낌이 참 흑흑. 그러고보니 자잘하게 베인 상처에는 liquid bandaid가 잘 들어요- 물 묻어도 이미 상처를 봉합해놓은 상태니까 편하고요 +_+

 Commented by 소냐 at 2007/11/12 14:48 

으아.. 아팠겠어요.. 칼은 어딘가에 사용되기 전에 피를 마셔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듯.. (어느 판타지 소설인지 일본 대하 소설인지..-_-;;)

그래도 완성한 (마음에는 안드신 거 같지만) 요리가 있으니 영광이 전혀 없지는 않잖아요??

 Commented at 2007/11/12 14:5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샤인 at 2007/11/13 00:50 

전 예전에 그 나무스탠드에 가지가지 꽂혀진 나이프셋트로 샀다가

이젠 사과마저도 잘 안썰리는 쇠덩어리가되버린 칼을쓰고있는중이라 ㅜㅜ

칼에 베이신건 섬짓; 이지만 그래도 어디제품인지 궁금한데요? ㅎㅎ

연고잘챙겨바르시고 얼른나으시길!

 Commented by blackout at 2007/11/13 05:21 

저는 슌~ 유틸리티 나이프를 좋아해요. 삭삭 잘 잘리거든요. 저의 가장 메이저 컷은 퀴진아트 푸드프로세서에 달려오는 원형 칼날을 설겆이 하다가 오른쪽 검지를 베었을때일거에요. 어찌나 피가 나오던지 이거 계량컵에 모아볼까, 라고 그 상황에서 잠시 고민했다는.

 Commented by conpanna at 2007/11/13 11:34 

전 호박깎다가 칼날을 왼손 엄지에 박은 아픈 기억이 떠오르네요..

설날연휴라 응급실에서 상처를 꼬매며 쏟았던 피와 눈물이…ㅠㅠ

아직도 영광스럽지 못한 상처가 남아있어, 간혹 누가 물으면 17대 1로 싸우던 중 칼주먹을 방어하다 살짝 찢겼다고 대답을 하곤 한답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11/13 14:00 

잔야님: 종이라면 저도 만만치 않게 만지는지라 페이퍼컷 10센치 넘는 것도 먹어본 일 있어요. 종이에 베면 참 아프잖아요T_T

소냐님: 제 칼들, 심지어 채칼조차도 제 피를 마셔서 다들 제 몫을 신들린 듯 잘 한답니다.

비공개님: 대체 얼마만데 제 블로그에 답글을…T_T 귀찮아서 밴드 다 떼버렸어요.

샤인님: IKEA같은데서 나오는 칼은 정말 칼도 아니더라구요. 그런걸 사는 제가 제정신 아니죠…그런데 사우스 캐롤라이나 사시나봐요. 저 사는데가 한 두시간 밖에 안 걸리는데(그린빌까지 100마일 조금 넘을걸요?). 제가 산 건 반액세일하는 스위스 아미제품이에요. 스위스에서 만들었는데 15불이라고…

blackout님: 저도 좋은 것 같고 싶은데 너무 비싸잖아요T_T 설마 피를 모아서 마시지는 않으셨으리라…

conpanna님: 호박이나 이런거 자르거나 깎을때 조심해야 된다고 요리프로그램에서 많이 그러더라구요.호박을 자를때는 손으로 칼날을 누르지 말고 밀대나 고기 망치등으로 살짝살짝 내려 치면 훨씬 안전하고 쉽더라구요. 17:1 칼주먹이면 손가락이 도마 안중근선생 비슷해졌을 것 같은데…

 Commented by 재인 at 2007/11/13 14:37 

앗 괜찮으세요? 손다치면 불편한데 ^^; 조심조심하세요~

 Commented by 샤인 at 2007/11/13 23:40 

네 Goose Creek이라고 N. Charleston 바로 옆에 살아요. 촌구석;; -_-

진짜 칼이 칼이아니예요 ㅡㅜ 쇳덩이라는!!

양파를 썰려면 미끄덩~해버리고 사과껍데기도 못파고들어가는수준이 되버렸음;

내일쯤이나 여기저기 좀 돌아봐야겠다는.. 정보감사해용~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11/16 12:45 

재인님: 뭐 저도 손이 재산이라 다치면 안 되는데, 이 정도 상처는 뭐 웃으면서 흐르는 피를 빨아 먹는 수준이죠^^ 벌써 다 나았답니다. 염려해주신데 감사드려요~

샤인님: 홈피에 제가 산 칼의 아마존 링크 남겨놓았는데 보셨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