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대체 뭘 하고 사는지도 모른채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가을이 등 뒤에서 손을 흔들고 있군요. 그렇게 좋은 날씨를 주려고 노력했건만, 친구들이랑 술집 야외테라스에서 술 한 잔도 안 마시고 대체 뭐 했냐고, 너같이 날씨를 못 즐기는 게으른 놈들한테 더 이상 혜택주기 싫어서 올해는 좀 빨리 돌아가겠노라고 말하는 모양새가 기분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네요. 맨날 입버릇처럼 가을만 오면 좋겠다고 해대다가 막상 찾아보니까 너무 보는 척 마는 척 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건 정말 제가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뭐 어쩔 수 없죠, 내년을 기약하는 수 밖에… 오기 싫어도 또 때 되면 여름한테 멱살 잡히고 겨울한테 등 떠밀려서 찾아올 것테니까요.

올해는 정말 좋은 계절이 너무나도 빨리 간 것 같은데, 그 동안 뭘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요. 오랫동안 해 뜨기 전에 출근해서 해 지고 나서 퇴근하는 생활패턴을 반복하면, 그 패턴의 관성 탓에 그 전의 패턴으로 돌아가는게 낯설다고 느껴질 때가 많거든요. 그러다보면 그 가운데의 어느 지점에서 기억을 잃은 듯한 상태가 찾아오곤 하죠. 오늘도 일찍 들어와서 집에서 밥을 차려먹다보니 정말 아주 오랜만에 밥을 차려먹는건가, 라는 생각도 들고, 또 나 혼자, 그것도 뭐 꽤 전에 해 놓은 밥이며 찌개 따위를 데워서 먹을지라도 집에서 식탁에 앉아 먹는다는 사실에 감사라도 해야 되는 걸까, 라는 생각도 들고 모든게 뒤죽박죽이에요. 거기에 사람의 온기를 며칠 맛보지 못한 집안의 공기는 너무나도 을씨년스럽기까지 하구요.

그리고 그런 혼란스러움은 블로그 세계에도 찾아오곤 하죠. 시간이 이렇게 잠깐 나더라도 무슨 얘기를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얘기를 시작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또 그 전에 멀쩡하게 늘어놓는 말들이 낯설어져서 관자놀이를 쿡쿡 찔러 두통을 일으키기도하죠.

하여간 어느새 좋은 계절은 다 가고 추워져서, 급기야 난방까지 틀어야 했던 아침에 생각을 해 보니, 몸은 이미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왔지만, 마음은 그렇게 삐져서 떠난 가을의 손을 놓지 못한채 환절기의 언덕 너머로 사라져 이제 가물가물한 것 같네요. 빨리 다시 데려오지 않으면 올 겨울도 꽤나 추울텐데…

 by bluexmas | 2007/10/31 09:40 | Life | 트랙백 | 덧글(8)

 Commented by 재인 at 2007/10/31 10:43 

장필순의 노래가 생각나요 🙂

 Commented by poppy at 2007/10/31 11:42 

가을이 오니 안그래도 게으른 녀석이 먹기만 하고 땡자땡자.

제 이야기입니다.

 Commented by 소냐 at 2007/10/31 11:55 

저두 이가을 그냥 보내는 듯 했는데 지난 일요일 가까스로 보스턴 산책나갈 기회를 잡았더랬죠. 제가 보기에 이곳의 정취는 정말 가을이 최고인 거 같아요. 온통 붉은 벽돌 투성이라 단풍이 잘 어울려 그런 거 같아요. 날씨도 참 좋지만..

그래도 일요일에 논 값을 어제 오늘 아~주 톡톡히 치르고 있답니다.. ㅜㅜ

 Commented by 笑兒 at 2007/10/31 14:34 

여기는 벌써 0℃ 한번 쳤어요 ;ㅅ;

싸락눈도 잠시나마 날리고 ;ㅅ;

월동준비 단단히 하셔요 🙂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11/01 12:27 

재인님: 요즘 업데이트가 뜸하셔서(물론 그 이유는 너무나 행복하고 부러움을 살만한 종류의 것처럼 보이지만^^), 읽는 재미가 너무 저조해요. 그나저나 장필순의 노래는 재인님 세대에게는 좀 오래된 것 아닌가요?

poppy님: 어떤 맛난 걸 해드시는지… 예전에 올리셨던 북어구이 사진 보고서 저도 해먹어야겠다고 마음먹은지가 벌써 수천년인데, 파는 북어들도 마음에 안 들고, 또 자꾸 까먹네요.

소냐님: 이미 가을은 가버렸어요. 11월인데… 전 일요일에 일하고 아주 그냥 버벅거리고 있답니다. 책상에 앉아있기도 버거워요.

笑兒님: 그러게, 그 동네는 이제 많이 춥겠네요… 월동준비, 위에서 말한 것처럼 몸은 다 되어 있답니다. 문제는 마음이 시려서…

 Commented by poppy at 2007/11/03 00:47 

요새는 나물에 버닝중이에요.

무우나물, 고사리나물, 시금치나물, 가지나물, 도라지나물 등등?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11/04 12:15 

저도 간만에 나물 좀 해 먹으려고 수퍼에서 말린 고사리랑 그 고사리 사면 덤으로 주는 취나물을 사와서 일단 취나물을 볶아봤는데, 이게 물에 30분 넘게 삶아도 부드러워지지가 않던데요? 도라지도 그렇더니 역시 중국 나물은 정말…-_-;;

 Commented by 재인 at 2007/11/04 14:51 

어느새 종종 노래방에서 부르는데, 부를 때마다 구박 받아요. 아직 어느새 할 떄가 아니라나 후후.. 뭐 곧이겠죠 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