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업 경과보고
오늘은 생전 가본 적도 없고 또 앞으로도 가볼 일이 없을 것 같은(그리고 사실은 싫어하는) 도시 어느 외곽 지역의 녹화 작업을 맡아 해가 저물고 깊은 밤이 찾아올 때까지 나무를 심고, 잔디를 입히고, 도로를 포장하고, 물을 채웠습니다. 아침 아홉시 조금 넘어서 일어나 늦을까봐 서둘러 갔더니 젠장, 점심 먹고나 슬금슬금 나타나면 양반인 것이더군요. 사실 이쪽 일이 대부분 마감에 다가갈 수록 시간보다는 결과를 더 따지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일찍 오는게 손해죠. 일찍 왔다고 일찍 갈 수 있는 상황이 꽃피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요. 그리하여 요즘 그 어떤 텔레비젼 쇼보다 더 즐겨 보는 The Next Iron Chef도 못 보고, 월드 시리즈도 못 봤네요. 그래도 오늘은 뭐랄까, 일을 하면서 뭔가 배우는 걸로 따져볼 때 상당히 많은 것을 얻었기 때문에 그래도 만족할 만한 하루였어요. 하고 하고 또 하고, 그래도 모자라서 또 하게 만드는 일을 열 두 시간 하는 것보다는 낫죠. 게다가 어차피 눈치 봐서 오늘 일했던 시간에 다른 날 쉬든지 할테니까 사실 뭐 엄청난 손해는 없는 셈이죠. 단지 일요일에 일하면 월요일이 그렇게 상쾌하지 않은게 싫을 따름입니다…
…생각해보니까 주말에 일 안 한지 벌써 일 년도 넘었더라구요. 작년 여름에 이 팀으로 옮겨왔는데 사실 그 이후에는 주말에 일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잘은 모르지만 제가 은근히 벤치마킹 비스무리한 생각을 가지고 지켜보는 부장급 매니저가 있는데, 이 사람이 회사에 있어서 인사를 했더니, 매주 일요일 아침 아홉시 부터 열 두시까지 회사에 나와서 주중에 정리하지 못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구요. 보통 매니저들은 주중에는 전화와 이메일 응대에 바빠서 정작 일은 못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뭐 이런 상황을 보면 제가 아무리 승진으로 대표되는 조직생활에서의 성공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 걸 떠나 일 자체를 매끄럽게 하려면 저런 것도 필요하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사실 저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고 별로 관심도 없는데 ‘아, 이 일을 잘 하는게 내가 여기에서 인정받는 계기가 되겠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회사를 다니고 싶지는 않아요. 단지 하는 일들을 저 스스로 만족-결과 뿐만 아니라 과정도-할 수 있는 만큼만 할 수 있다면 그 나머지 것들은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이런 얘기를 어디 가서 하면 멍청하다고 핀잔 얻어먹기 딱 좋죠(그러나 여기에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군요. 참 저라는 인간은 왜 이다지도 한심한지 -_-;;;)… 그러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런 생각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어요. 뭐 보스가 나간지 이제 딱 이틀 지났는데, 나가기 며칠 전부터 주변 분위기 바뀌는 걸 슬슬 제 3자(내지는 냉담자 혹은 뭐 방관자)처럼 바라보고 있으려니, 누군가 반은 자랑조로 ‘언제 이런저런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그 기회를 잘 잡아서…’ 라는 얘기를 했던 것이 바로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상황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미국애들이 이러한 상황에 행동하는 꼬라지를 보고 있노라면, 그제서야 깨닫게 되죠. 얘들이 이런 애들이었던 것이라고…
재미있어요, 요즘 돌아가는 상황 지켜보고 있으면… 전 뭐…그냥 불구경하듯 바라보고 있으려구요. 언제나 이방인에 불과한 걸 뭐.
# by bluexmas | 2007/10/29 14:51 | Life | 트랙백 | 덧글(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