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야근
정규근무시간만 넘기면 야근이니까 거의 매일 야근하는 처지라고 해도 그렇게 지나친 말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제대로 하는 야근은 아주 오랜만에 처음이네요. 열두시 땡치고 퇴근. 정말 눈을 반쯤 감은채로 머나먼 길을 달리고 또 달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텅비고 썰렁한 집으로 돌아와 샤워라도 하고 나면 귀찮아질 것 같아 옷도 안 갈아입은채로 도시락을 싸고 또 내일 아침 쓰레기 수거 타이밍에 맞춰 쓰레기까지 내어 놓고 컴퓨터에 앉으니 벌써 새벽 한 시를 훌쩍 넘겼네요.
회사 다니고 거의 처음으로 디자인 비스무리한 걸 하게 되었는데 이런 짓거리 안 해본게 거의 3년이다보니 가뜩이나 시원치 않은 마당에 습관처럼 가지고 있던 과정이 전혀 기억나지 않더라구요. 언제나 그렇듯이 만들어 내는 것들 족족 마음에 안 들어하다가 남들 퇴근할때쯤 적당히 타협하고 별로 아름답지 못한 스케치를 이 시간이 되도록 열심히 만들어 내다가 퇴근했죠. 언제나, 정말 언제나 드는 생각인데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면 자신의 불완전함을 뻔뻔스럽게 무시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무슨 얘기냐면, 저는 언제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때로 그걸 사람들 앞에서는 적당히 감추고 무시할 줄 알아야 이런 계통의 직업에서는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그렇지 않으면 바로 공격이 들어오기 때문에… 잠이 와서 문장이 두서가 없는데 나중에 다시 한 번 얘기해보기로 하죠.
참! 어떤 분들은 또, 건축회사 다니는데 보통 하는 일이 디자인 아니냐고 물어보시더라구요. 만약 그렇다면야 회사 다니는게 한 편으로 더 즐거울 수도 있겠지만, 사실 건축회사에서 특히 저 정도 레벨의 직원이 하는 일은 디자인보다는 코디네이션에 가까운게 현실입니다. 특히나 제가 다니는 회사처럼 몇 백명 규모의 큰 조직에서는 더더욱 그런 경향이 강하죠. 이것도 언젠가 글을 쓰고 싶은 주제이므로 통과(뭐 이렇게 생각만 해 놓고 안 쓰는 주제가 수백만개라더라구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제의 짤막한 글을 보시고 어떤 분들은 뭐 어제가 엄청나게 저조한 날이 아니었냐고 *고맙게도* 물어봐주시던데, 사실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냥 한마디로 말해서 어제 생긴 일들은 대체 무슨 감정을 느껴야 될지 모르는 것이었다고나 할까요. 보통 사람들은 학습 내지는 본능에 의해 대부분의 사건들에 일대일 대응으로 감정을 느끼게 되죠. 뭐 이를테면 하루 종일 쫄쫄 굶다가 끓인 라면을 입도 대기 전에 쏟아서 못 먹게 되었는데 더 이상 남은 라면도 쌀도 없음을 발견하게 되었을때 느끼는 감정은 슬픔일테고 3년 사귄 여친에게 청혼하려고 반지를 산 날 자기의 제일 친한 친구와 엮이고 있다는(그것도 여친의 적극적인 주도하에) 사실을 알았을때의 감정은 배신감이 되겠죠. 뭐 하여간 늘 그런 식으로 사건과 감정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제 닥친 일들은 대체 슬프다고 하기엔 너무 웃기고 또 그렇다고 해서 마음놓고 웃자니 슬픈데다가 양념으로 배신감과 수치스러움도 군데군데 섞인 것 같고…
뭐 하여간 그랬다구요. 사실 어제는 굉장히 재미있는 하루였어요. 어느 누구에게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의 근원 따위를 길고 긴 시간이 지난 뒤에 스스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을 발견한 뒤 느낄법한 흥미진진함 같은 감정을 발견했다고나 할까요…
# by bluexmas | 2007/10/03 14:26 | Life | 트랙백 | 덧글(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