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수의 휘발성에 대한 영양가 없는 경험담

년 전 대학교 새내기 시절 세 번째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의 옷차림새(쥐색 바지 정장에 아이보리 실크 탑, 6cm 힐… 저는 청바지에 모자티-_-;;;;)랄지, 3년 전 크리스마스 즈음에 딱 한 달 반 동안 수퍼마켓을 강타하고 사라졌던 한정판 루돌프 사슴모양 Milky Way의 칼로리 따위-한정판은 설탕을 더 많이 넣어서 칼로리가 더 높죠-의, 길고도 긴 인생을 살면서 전혀 도움도 되지 않는 온갖 쓸데없는 것들만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저에게, 언제나처럼 삶의 진리를 나눠 저를 사회에 맞는 바르고 성실한 인간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마음 따뜻한 사람들은 뇌수의 휘발성이 보통 사람들보다 떨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쓸데없으면서도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다 기억하고 산다고 조언을 건네더라구요.

뇌수의 휘발성이라… 저에게 그 얘기를 해 준 사람에 의하면, 계속해서 사람의 뇌에 새로운 기억들이 들어오면 FIFO(First In, First Out)의 원리로 예전의 기억들 가운데 쓸모 없는 것들이 뇌주름을 통해 뇌 밖으로 추출된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추출된 기억은 휘발성이 강한 뇌수와 섞여 뇌수가 땀이나 기타 신진대사로 인해 기화되어 사람의 몸에서 떠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자질구레한 기억까지 짊어지고 사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살며시 한 마디 더 덧붙이더군요. 그래서 제 머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큰 모양이라구요. 머리 좋은 사람들처럼 뇌가 커서도, 박치기 공룡처럼 두개골이 두꺼워서도 아닌 휘발성이 약한 뇌수가 남들보다 더 많이 축적되기 때문에…

사실 머리 크기는 제 컴플렉스의 영원한 젖줄이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라도 뇌수의 휘발성을 좀 향상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솔직히 그보다도 지난 7,8년 동안 뇌에 누룽지처럼 눌어붙은 그 잊고 싶은 기억들을 좀 걷어 내고 싶었기 때문에 저는 그에게 한 달 내내 점심을 사가면서 그가 전수해주는 뇌수휘발성향상을 위한 비법-물론 여기에 공개할 수는 없는-으로 단련을 해 온 것이 어언 2년 하고도 6개월 정도? 시간이 흐르는 동안 꽤나 많은 기억들이 제 머릿속을 떠난 것 같아서 정말로 제 뇌수의 휘발성이 향상된 것일까, 라고 내심 흐뭇해하고 있었거든요. 아, 아주 가끔씩은 이렇게 싸가지 없는 나도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종종 있구나, 라는 예의바른 생각과 함께.

그러나 알고보니 그런 저의 생각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진 것 같아요. 어제 아주아주 오랜만에 그 눌어붙어 있던 기억의 주연 배우를 우연히 보게 되었거든요(‘마주쳤다’ 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이유는 아무래도 그는 저를 보지 못한 것 같아서요)… 정말이지 단 3초간 본 것 같은데 뇌수의 휘발성 향상에 힘입어 사라졌다고 생각되는 그 눌어붙은 기억들이 순식간에 들고 일어나 활활 타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어찌나 신나게 타오르던지 갑자기 머리 속이 완전히 텅 비는 것 같아서 늘 열 두 번만 해야되는 턱걸이를 열 다섯 번도 넘게 하고는 어지럼증을 느껴 그대로 떨어질 뻔 했죠.

뭐 다행스럽게도 한 10분 정도만 타고는 잦아들었기 때문에 저는 아무에게도 저의 상태를 들키지 않은채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분명 쓸데없는 기억들을 없애줄 것으로 믿고 그토록 향상시키려 애써왔던 이 빌어먹을 뇌수의 휘발성이라는 것이 사실은 그것들을 없애는데 도움을 주기는 커녕 그 기억의 근원과 맞닥뜨렸을때 미친듯이 활활 타오르는데 도움을 주는 요소였다니, 그 허탈감이라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네요. 그래서 하루가 지나도록 생각의 고리를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요. 앞으로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머리를 열어서 뇌수를 교체라도 해야될까? 라는 불안감에 시달려서 오늘은 일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던데… 사실은 다음달 13일에 전신마취를 동반한 임플란트 시술이 예정되어 있어서 가능하다고 해도 올해 안에는 뇌수 교체할 체력이 없거든요.

 by bluexmas | 2007/09/26 12:51 |  | 트랙백 | 덧글(6)

 Commented at 2007/09/26 13:1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7/09/26 15:1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9/27 13:59 

비공개 1님: 작가 1은 마지막으로 읽은게 20년 전, 2는 읽어 본 적이 없구요, 3은 황송하게도 다른 분도 언급하신 적이 있는데 마지막으로 읽은게 10년 전인가… 그저 저는 황송하기만 하네요-_-;;;

사실 그제도 별 일 아니었고 다 지나가서 지금도 아무 생각 없답니다. 고백하자면 오래 전에 비공개님 블로그에서 글을 읽고는 저도 생각나는게 있었어요. 거기에 마침 기폭제가 생겨서 이렇게 비문을 쓰게 되었네요.

비공개 2님: 빙고! 역시 딱 맞추시는군요. 참 자주 벌어지는 일이 아닌데 그렇게 되었답니다. 히히…

 Commented by D-cat at 2007/09/27 18:54 

저는 기억해야 할 것은 잊어먹고 잊어먹어야 할 것들이 기억나서 고생입니다. GG

 Commented at 2007/09/27 23:2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9/28 16:04 

D-cat님: 그것이야말로 아주 전형적인 인류의 특질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다들 아닌 척해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답니다^^

비공개님: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공개님의 글을 읽고 기억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마음만 오랫동안 먹고 있었다가 우연치 않게 잠자는 기억이 기억의 구성원 덕택에 깨워진 사건이 발상하야 저렇게 비문을 남기게 된 것이죠. 저한테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답니다. 알고보면 두 사건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전혀 없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