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작은 소동
집과 회사의 중간 정도 되는 곳에 프랜차이즈가 아닌 커피가게가 하나 있는데, 여기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가끔 일부러 들러 커피나 에스프레소 더블샷을 사들고 회사로 가곤 합니다. 유기농 커피로 뽑은 에스프레소는 쓴 맛의 파도가 한 바탕 몰아치고 난 뒤 감도는 부드러움이 감동이어서 한참 동안은 지각하는 한이 있어도 꼭 들곤 했는데, 요즘은 고속도로 빠져 나가기가 귀찮고 또 10분 이상 손해를 봐야 되기 때문에 잘해야 일주일에 한 번 정도나 들를까 말까 했었죠.
그러다가 오늘, 다른때보다 10분 늦게 집을 나선데다가 차도 조금 더 막히는 그런 날에 정말 꼭 그 가게의 에스프레소가 마시고 싶어지더라구요. 그래서 지각하기로 마음 먹고 차를 돌려 고속도로를 빠져 나가 가게가 있는 상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더블샷을 주문해서 차가 신호에 걸려있던 동안 단숨에 들이켜 진한 카페인을 혈관에 가득 채우고 아주 들뜬 마음으로 나머지 길을 달려 회사에 도착을 했는데…
…지갑이 없더군요 OTL
이런 경우 보통 차 조수석에 던져놨다가 차가 섰을때 바닥으로 떨어져 굴러다닌다거나 주머니가 오만개 달린 출퇴근용 가방 어딘가에 짱박혀 있기가 쉽상이어왔기 때문에 별 걱정도 없이 가방과 차를 두 번이나 뒤져봤는데, 역시 보이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돈은 거의 가지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쳐도, 지갑이 없어지면 그 안에 들어있는 운전면허증(다시 발급 받기 위해서 다섯시 반에 집을 나서야 줄 안서고 재발급 가능하다고…), 마일리지 적립 때문에 몰아 쓰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와 그걸 안 받는 몇몇 가게들을 위해 함께 들고 다니는 비자카드, 가끔 현금을 뽑기 위해 들고 다니는 직불카드, 요즘은 거의 쓸 일이 없어 동면상태나 다름 없는 모 옷가게 카드, 두 군데 멀티플렉스 회원카드, 저 문제의 커피 가게 마일리지 카드, 치과와 일반 병원 보험카드, 학교 체육관 출입과 아주 가끔 영화관에서 속여 할인을 받는데 유용하게 쓰는 옛날 학생증.. 등등의 그 많은 카드들을 분실신고하고 또 재발급 받기 위해서 돌려야만 하는 1-800 고객상담전화와 그 대기시간, 또 새로 입력해줘야 하는 카드 번호따위까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아침에 생지옥으로 가는 문이 새롭게 열린 셈이죠(겪어 보신 분들은 다 아실 듯…).
하여간 그런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커피가게로 전화를 돌려보니, 착한 누군가가 지갑을 주워서 가게에 맡겨 놓았다고 하더군요. 아아… 제가 요즘 여러가지 상황에 정신이 좀 없기는 해도 해야될 일을 안 하거나 공과금 납부기한을 넘긴 적은 거의 없는데, 아주 가끔, 뭐 1년에 한 번 정도 이런 실수를 저지를 때가 있거든요. 또 저지르면 좀 크게… 하여간 안도의 한숨을 아주 길게 쉬고 점심 시간에 다시 차를 몰아 가게에 들러서 지갑을 찾아왔죠. 뭐 무사히 다시 찾은 마음에 축배라도 들려고 금요일에 마실 커피(저는 보통 이틀에 한 잔씩 커피를 마십니다)까지 사가지고 회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하루는 이걸로 액땜한 것일까요?
다른 때보다 약간 늦게 퇴근해서 아홉시 반이 넘은 시간에 운동을 마치고 차를 타려고 보니, 커피 가게에 들른 바로 다음에 기름을 채우려고 들른 길 건너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는 마개를 닫지도 않고 출발… 차의 급유구가 열려 있고 마개는 오래전에 행불상태더군요. 차가 오래되어서 주유구에 연결이 되어 있지 않다보니 역시 1년에 한 번 정도 마개를 길에 버리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따져보니 지난 번으로 부터 거의 1년… 때가 되었던 것이죠. 그리하여 집에 오는 길에 또 주유소에 들러 오래전에 어두워진 주유소 주차장을 두어바퀴 돈 다음에야 다행스럽게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할 때 간이랑 쓸개만 빼서 냉장고에 고이 모셔두고 출근하는데, 오늘은 피곤해서 정신없이 빼다가 뇌도 같이 냉장고에 모셔졌던 것인지 웬만해서는 저지르지 않는 멍청한 실수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저지르고 나니 요즘 저라는 사람이 이렇게 정신이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럴때 정말 조심해야지, 더 큰 사고라도 칠까봐 내심 두려운게 사실이에요. 뭐 점심 시간에 밥을 코나 눈에 넣는다거나, 차 번호판도 확인 안 하고 무조건 색이랑 모델 같다고 내 찬줄 알고 알람이 울림에도 불구하고 열쇠를 열심히 쑤셔댄다거나(아니, 내 차는 싸구려라 알람 없는데 누가 대체 언제 설치를 한거야! 라고 속으로 궁시렁대면 금상첨화겠죠-_-;;;)…
# by bluexmas | 2007/09/20 13:47 | Life | 트랙백 | 덧글(8)
그러다가 지갑이 없다고 하는 순간 마구 웃음이 터졌습니다. 히히 죄송..
그런 날이 있죠.. 저야말로 나사가 가끔 빠지는 사람이라…
그래도 큰일이 안나서 다행입니다 ^^
비공개 덧글입니다.
신용카드 기한 초과 두 건에…
몇년전에 받아놓은 자격증 갱신 기간을 놓쳐
다시 재시험을 치뤄야 하는…
일년에 한번, 많으면 두번… 나사가 빠지는 통에…
쓰지 않아도 될 돈을 약 100불 가량 써야했지요. ㅡㅡ+
지갑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 벌어지는 chaos를 경험한 자로서…
님의 불행 중에 행운에 심심한 축하를….^^
intermezzo님: 다 괜찮은데 정말 면허증 재 발급만은 죽어도 면하고 싶었기 때문에, 정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바닥이 꺼지는 것을 느꼈다니까요.
blackout님: 뉴욕쪽에는 Full Service 주유소가 많은가봐요. 여기는 거의 없거든요. 그런 경우에 주유소에서 돈 물어줘야 되지 않을까요?
소냐님: 저는 사실 쓰는 내내 별로 쓰는 재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이네요. 다들 그런 순간들이 찾아오는 것 같아요.
D-cat님: 그런 날일 수록 정말 더 큰 재앙이 찾아오지 않게 주의를 해야되더라구요. 이를테면 차 사고랄지…
비공개 1님: 목요일에 금요일에 마실 커피까지 다 마시고 금요일에도 커피를 또 마셨답니다. 요즘 갈수록 커피 양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비공개 2님: 뭐 살다보면 다 그런거죠… 저도 예전에 학교에서 여러날 밤 새고 집에 가다가 길을 걸으면서 졸아서 돈을 흘린 적이 있었는데 참 난감하더라구요.
erasehead님: 그래도 저는 공과금 이런 건 저의 초인적인 기억력으로 마감날 간신히 내서 여태까지는 그럭저럭 버티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