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안녕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계속 생각했죠. ‘안녕, 여름’ 이 좋을까, ‘여름, 안녕’ 이 좋을까, 라구요. 집에 도착 했을때 까지는 ‘안녕, 여름’ 이 대세였는데, 차고문이 덜컹, 열리는 소리에 갑자기 ‘여름, 안녕’ 처럼 ‘안녕’을 끝에 붙이는게 사라지는 무엇인가에 대한 인사처럼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마치 옛날 무슨 무좀약 광고 끄트머리에 ‘무좀, 안녕~~’과 같은 길고 긴 여운의 메아리를 넣어 그 지긋지긋한 불치의 무좀에게 작별인사를 고하는 것 처럼…

물론, 달력이 9월로 접어 들었다고 해서 바로 가을이 찾아 오지는 않아요. 더구나 아틀란타같은 더운 동네에서는… 그러나 8월이 가니 마음이라도 조금은 가벼워지는 느낌이라 한결 낫네요. 정말 해를 거듭할 수록 여름 나기가 힘들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돌아보면 올 여름은 정말 혼수상태였던 것 같아요. 체력은 이미 7월 말에 다 소진되어버렸고, 그 덕분에 가뜩이나 분산되는 의식도 가다듬을 여유를 찾지 못해서 여름 내내 제 생각에는 큰 줄기 없이 메마를대로 메말라버린, 실핏줄처럼 자잘한 개울들만 널려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죠. 정말 요 며칠 사이에 그 수천 수만개쯤 되는 것 같은 의식의 실개울들이 저 밑 어딘가의 하천에서 모이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구요.

하여간, 그렇게 여름도 가고 있으니 기분이라도 내볼까 해서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산 와인을 마시고 있었어요. 사실 이 와인은 제가 요즘 가는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말로는 정말 여름 분위기 summery 나는 와인이라고 하더라구요. 지난 주에 해 먹은 홍합에 맞을만한 화이트 와인을 찾아 헤매다가 점원 중 누군가가 추천을 구하는 손님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을 엿듣고는 사려고 했었죠. 오늘 저와 얘기한, 나이가 50 중반쯤 되어 보이는 점원 아저씨는 가볍지만 솔맛이 난다(piny)고 그랬는데 마셔보니까 딱 알겠더라구요. 뒷맛이 약간 씁쓸한게 처음 따른 잔을 다 마실때까지는 굉장히 똑 떨어지는 느낌이거든요. 참, 생각해보니 여름이 지나가는 걸 기뻐해서 마시는 와인이 가장 여름 분위기 나는 와인이라니 좀 이상하지만, 오늘 저녁에는 안주가 없으니 뭐 아이러니라도 안주 삼을 수 있다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 같네요. 반 병만 마시고 나머지는 내일 뭔가 안주거리를 만들어서 먹을 듯.

참, 지금 마시고 있는 와인이 스페인 출신인 것을 보니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어요. 4년 여름 학기에 유럽을 돌때, 처음 들른 도시인 파리에서 지도 교수 크리스는 정말 파리의 거의 모든 중요한 장소에서 와인을 사오라고 해서 같이 마시곤 했거든요. 그래서 에펠탑 아래(그 군사학교 Ecole Millitaire 지하철 역이 있죠), 세느 강변, 몽마르트 언덕 등등, 정말 한 3일에 한 번씩 와인을 마시곤 했는데 그때 저는 뭐 와인이라는게 포도로 담근 술이라는 것 사실 밖에 모르는 촌뜨기 학생이어서 와인을 사오라고 그러면 정말 싼 것만 샀었죠… 그러던 와중에 몽마르트에서 술을 마시자고 해서 어느 구멍가게에서 눈에 보이는 대로 싸구려 화이트 와인을 집어 왔는데, 마시려고 보니 이게 스페인 산이더라구요… 와인의 나라 프랑스에서도싸구려만 찾다 보니 결국 걸리는게 비 프랑스산이라니 너무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하여간, 오늘은 너무 피곤-늦게 퇴근했거든요-해서 얘기도 두서가 없으니 이만 접어야 겠네요. 오늘 제 블로그에 들르신 분들, 직접 나눠 드릴 수는 없지만 마음만으로라도 저 와인 같이 마셨으면 좋겠어요. 다들 여름나기에 고생 많이 하셨죠? 이제는 뭐 서늘함과 조금 바랜 빛깔의 하늘 뭐 이런 것들을 기대할 수 있는 시간들이 다가오고 있네요. 

 by bluexmas | 2007/09/01 13:47 | Life | 트랙백 | 덧글(10)

 Commented by 쏘리 at 2007/09/01 16:31 

저는 와인을 잘 모르기도 하고…자주 안마셔서 그런지…

맛은 잘 상상이 안되지만. 눈으로라도 마시고 가요. ^-^;

 Commented by SvaraDeva at 2007/09/01 21:17 

미국에선 좋은 프랑스와인 살 수 있는 곳 찾기가 너무 힘든 것 가타요.

 Commented by 소냐 at 2007/09/02 00:48 

오늘 아침 일어나니까 솨-하고 차가운 바람이 열린 창으로 들어오더라구요. 9월이 된 것을 알려라도 주듯.. 어제까지만 해도 너무 더워서 창이란 창은 다 열어젖혔었는데 말이죠. 보스턴의 9월.. 제가 이동네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오고 있네요. 기대기대~~

 Commented by erasehead at 2007/09/02 01:01 

와인은 모두 ‘sam’s club’에서 미국산 와인만 샀던 기억이…. (모두 선물용이었습니다만…^^)

 Commented by Eiren at 2007/09/02 12:56 

슬픔이여, 안녕..이란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 포스팅 제목이군요. 어떤 안주를 겻들여 남은 와인을 드셨나요?전 아무리 노력해도 아직까지 와인의 깊은 맛을 모르는지라, 아이스와인과 스파클링 와인만 맛있더라고요;;;

 Commented by D-cat at 2007/09/02 23:32 

다행히 이쪽은 가을 분위기가 술술 납니다. 제법 밤이 서늘해져서 반팔로 돌아다니기 곤란해지고 있어요. 이러다가 팍 겨울이 오겠죠;ㅅ;

 Commented at 2007/09/03 13:4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9/03 13:53 

쏘리님: 맛은…제가 말로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데 하여간 눈으로라도 즐기셨다니…

SvaraDeva님: 저는 아예 프랑스 와인은 생각도 안 하고 산답니다. 거기까지 손을 뻗치면 너무 알아야 될 게 많아지더라구요.

소냐님: 어제 오늘, 아틀란타마저도 정말 가을 분위기가 물씬 나더라구요. 보스턴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라서, 올해는 찬바람 불기 전에 한 번 가 보고 싶기는 한데…

erasehead님: 저도 비슷한 코스트코에서 많이 샀는데, 술가게가 더 싸다는 걸 알고는 이제 거기에서 안 사게 되더라구요.

Eiren님: 그냥 무좀 안녕~ 이라니까요. 히히… 저 역시 와인의 깊은 맛 따위는 모른답니다. 그냥 마실 뿐이죠. 어제 오늘은 조개 삶은 거랑 오징어 초고추장 무침 뭐 이런 거랑 먹었어요. 요즘은 단맛나는 와인은 그냥 그렇더라구요.

D-cat님: 언제나 여름 지나면 겨울이 너무 빨리 다가오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왤까요… 가을은 제대로 즐겨보지도 못하는 느낌이에요.

비공개님: 갑자기 조영남의 도시여 안녕…이 생각났어요-_-;;;

 Commented by 소냐 at 2007/09/03 23:34 

오오, 오시면 제가 열렬히(?) 환영해 드릴텐데~~ 10월까지는 날씨가 정말 좋답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9/04 13:34 

10월까지라… 생각 좀 해봐야겠는데요? 이번엔 보스턴 크림 파이 먹고 와야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