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도록 그리운 눈

더운 동네에 너무 오래 산 탓일까요? 집과 회사를 이어주는 고속도로의 중간쯤에 페인트 트럭이 엎어져서 생긴 것 같은 흰 얼룩범벅(사진에서 보시는 것과 같은)이 생겼는데, 지난 일주일 내내 여기를 지날때마다 눈을 밟고 걷는 듯한 착각을 느끼면서 등골이 오싹해지곤 했죠.

사실 그렇게 등골이 오싹해진다고 해서 눈이 차가운 성질을 지녔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언제나 눈이 내리면 그 추운 겨울에도 마음이 따뜻해져 오는 것을 느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따뜻한 마음으로 눈을 좋아하면 녹아버릴지도 모르니까, 제목에서처럼, 눈은 시리도록 그리워해야겠죠?

이제 8월도 17일, 아니 18일… 매일매일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 화씨 104도임을 알려주는 온도계를 들여다보며, 이렇게 찌는 듯한 날씨에도 버티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하루씩, 또 하루씩을 달력에서 지우고 있다죠. 8월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달이에요. 얼마전에 야구중계를 보다가 우리팀이 한 회에 8점을 따내니까 진행자가 말하기를 ‘아, 점수판에 눈사람을 올려놓는 것도 참 기분 삼삼하죠’라고…

그러게요. 8이라는 수자는 눈사람을 닮았는데 정작 8월은 왜 1년 가운데 가장 더운 달인지… 하여간 그렇게 더운 달, 저는 머리 끝부터 뼈속 깊은 곳까지 빽빽하게 들어찬 열병에 시달리고 있어요. 눈에는 핏발이 잔뜩 서 있고, 발은 퉁퉁 부었으며, 금요일 오후 하품을 하며 찍어내는 눈시울에는 목이 타도록 들이킨 커피로부터의 카페인이 촉촉히 배어나오곤 하죠. 그러나 저렇게 도로변에 엎어진 하얀 페인트 얼룩을 차로 밟고 지나가면서도 시리도록 눈을 그리워하고 있어요. 이 터지도록 가득찬 뜨거운 기운이 가실때쯤이면 표지만 보고 골라 집은 책 몇 권과 두 개의 카메라, 그리고 공책과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그 그리움을 묻어둔 북쪽의 어딘가로 떠날거라구요. 평생 눈을 바라보고 살아 설국의 지지미처럼 햐얗게 바래었다는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는 그곳에서, 저는 글자가 싫어질때까지 책을 들여다보다가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방을 나서 아무도 없는 벌판을 거닐어볼까 해요. 걷고 또 걸어 정말 아무도 없는 곳에 이르렀다는 확신이 들면, 휭하니 부는 바람소리, 뽀득뽀득 밟히는, 그리고 사각사각 내리는 눈소리 사이에 아주 오랫동안 불러보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흘려보내려구요. 이제는 세다가 세다가 지쳐버린 그 길고 길었던 시간 동안에 단 한 번도 제 입술 사이를 거쳐 차가운 공기 속에 제 몸을 섞지 못한 세음절의 존재들을…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그 이름들을 흘려보내다 보면 그렇게 미워해왔던 사람들의 그것도 이름들의 파도에 밀려 저의 기억속을 떠나게 되겠죠. 그러면 그제서야 오랫동안 꿈꿔보지조차 못했던 차가운 평온함이 냉돌같은 맨 방바닥에 쓰러져서도 다음날 아침까지 단잠을 잘 수 있을만큼의 따뜻함으로 제 지친 몸을 감싸주지 않을까요… 이불 따위는 그 어둡고 긴긴밤 내내 고작 발치에서 뒹굴고 있었다 해도 상관없도록. 

 by bluexmas | 2007/08/18 13:04 |  | 트랙백 | 덧글(7)

 Commented by intermezzo at 2007/08/18 13:10 

104도…!!

여름 휴가를 서늘한 북쪽이나 고산지대로 다녀오실 수 있으시기를…ㅡ.ㅜ

 Commented by 소냐 at 2007/08/18 13:37 

블루엑스마스님이 가시고 싶은 시리도록 차가운 그곳은 어디일까요… 차가운 평온함이라… 가을과 겨울을 타는 저로서는 차가움은 미칠 듯한 외로움과 곧잘 연결되는 느낌이어서 말이에요… 오히려 여름에 미움을 활활 불태우는게 정신건강에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더랬죠..

눈과 차가운 공기.. 이게 너무 많은 도시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저는 요즈음 여름이 가는 소리에 가슴이 내려앉고는 한답니다. 서늘해진 저녁 공기라든지, 확실히 짧아진 해라든지..

여튼 104도는 너무하네요..

 Commented by 이비 at 2007/08/18 13:41 

설국의 무대는 정말 인상깊었어요. 니가타 현에 있는 에치고 유자와 온천이라고 들었는데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눈 같은 팥빙수라도 드시면서 뽀득뽀득한 여름 보내세요~

 Commented at 2007/08/19 03:3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D-cat at 2007/08/19 23:05 

으으;; 덥군요;;;;

이번 여름이 유독 더운 기분입니다. 입춘도 지나갔다는데 왜 이런지;

 Commented by blackout at 2007/08/20 01:09 

여긴 어제 새벽 화씨 40도 까지 내려가고, 저는 오리털 이불을 꺼냈습니다. 세상 참 불공평하죠?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8/20 09:45 

intermezzo님: 언제나 마음에 두고 있는 바다가 있는데, 갈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9월에는 가고 싶은데…

소냐님: 사는건 알고 보면 환상의 목록을 만들어 두고 그 목록에 들어 있는 것들을 현실의 영역에 들여 놓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뜬금없는 얘기긴 한데 가고 싶은 겨울 여행지 생각을 하다 보니까… 마음에 품고 사는 곳이 있긴 하거든요. 저도 가을이나 겨울을 안 타는 건 아닌데 간사한 인간이다 보니 이렇게 더워지면 여름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거죠 뭐.

이비님: 저도 그 동네 가보고 싶어요. 팥빙수 얘기를 하시니까 생각이 났는데 기계라도 사서 만들어 먹어야 될까요… 어디서 파는지도 잘 모르거든요.

비공개님: 그러게요. 저는 밀워키까지 올라가봤는데, 그동네는 좀 매섭게 춥더라구요. 눈이 와도 따뜻한 느낌이 별로 없구요. 기회가 되면 또 가게 되겠죠.

D-cat님: 언제나 ‘올해가 가장 더운 여름이었어’,’올해가 가장 추운…’ 9월의 환상이라고, 9월이 되어도 금새 서늘해지지 않더라구요. 입추는 그냥 사기인거죠 뭐.

blackout님: 저도 발치에 오리털 이불이 있어요. 에어콘 때문에 추우면 덮으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