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꽃
저도 몰라요.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좌절꽃을 가꾸면서 사는지… 어쨌거나 저의 집 가장 햇볕이 들지 않는 북쪽 창가에는 제가 ‘본의 아니게’ 가꾸게 된 좌절꽃 화분이 있어요. 꽃 모종을 담는 검정색 비닐 화분에 담겨 있는 녹색의 꽃과 하얀 이파리들… 언제나 수줍은 듯 고개를 돌리고 있죠, 마치 저를 외면하는 것 처럼. 그러나 저는 별로 신경쓰지 않아요. 그래봐야 어차피 그녀석은 저의 좌절로 인해 만들어졌으니까.
대체 어떤 경로로 좌절꽃이 피는지는 아주 많은 의견들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정설이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는 없지만, 저의 경우는, 언제나 슬픈일만 생긴다고 믿던 그 시절, 제가 뿜어내는 좌절의 아우라가 공기 사이로 떠다니던 씨앗과 만나 꽃을 피웠던 것 같은데 뭐 모르죠… 다들 자기 생각이 맞다고 우겨대는 세상에 저는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귀찮아서라도 없으니까 내 꽃을 내가 어떻게 피웠다고 한들 얘기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어쨌든 주인을 닮아 좌절의 아우라만을 꽃이라면 반드시 가져야할 향기보다 진하게 풍기는 이 녀석은, 그 아우라 때문인지 그렇게 잘 자라지도 않아요.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식성이 아주 까다롭거든요, 제가 알기로 보통 좌절꽃들은 주인의 눈물만 먹어도 쑥쑥 잘도 큰다던데, 이 녀석은 눈물도 마른 눈물, 그것도 여러번 반복되는 마음의 상처로 인해 흘리다 흘리다 말라붙은 마른 눈물만을 먹기 때문에 제대로 영양을 공급해주기가 정말 쉽지 않아요. 뭐 그것도 주인을 닮아서 까다로운 것일테니 할말은 없지만.
이 녀석은 주인과 달리 그다지 붙임성이 있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말을 시켜도 그렇게 대꾸를 잘 하는 편은 아닌데, 지난주였나, 어느 날 밤, 언제나 창가를 향하고 있던 고개를 저에게 돌려 아주 정색을 하며 얘기하더군요. 이제는 죽고 싶다구요. 깜짝 놀라서, 저는 그랬어요. 얘야, 네가 아무리 내 좌절의 화신이어도 나의 일부분일텐데, 내가 어찌 네가 죽기 바라겠니… 그러자 녀석이 대답하기를, 저기요, 저는 이제 굶어 죽고 싶어요. 당신이 좌절할일이 없으면 내가 배를 채울 일도 없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면 저는 굶어 죽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그냥 죽고 싶다구요.
오, 불쌍한 녀석… 아직도 세상살이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불쌍한 녀석을 굽어보며 저는 말해줬죠. 어차피 산다는 건 좌절을 안고 태어나는 거라서, 네가 있거나 없거나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할 고통과, 그의 짝인 좌절의 양은 달라지지 않을거라구요. “사실은”, 제가 덧붙이기를, “나도 왜 그래야 되는지 대답을 구하지 못했고, 또한 아무에게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억울한 구석은 없으니까 네가 네 몫 이상의 걱정까지 할 필요는 없는거라구. 그러니까 나는 네가 내 좌절의 강도 및 빈도에 비례해서 무럭무럭 자라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굶어 죽기를 바라지도 않아. 자살을 하면 모르겠지만, 나는 여태껏 식물이 자살했다는 얘기를 식물 및 토양학자인 나의 아버지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거든.”
언제나 수줍어할 수 밖에 없는 그는, 그제서야 대답대신 고개를 다시 창가쪽으로 돌리고 명상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침묵에 빠져 들더라구요. 더 이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하얀 이파리들이 바들바들 떠는 것을 보니, 아마도 그는 스스로도 선택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유무에 대해 깊이를 알 수 없을만큼 좌절한 것 같더라구요. 그러나 어차피 녀석은 좌절꽃… 그것이 그의 운명이니 그렇게 내버려 둘 수 밖에요. 내가 내 삶에 도저히 손을 댈 수 없는 어떤 부분들을 가지고 있는 것 처럼.
# by bluexmas | 2007/08/02 12:24 | — | 트랙백 | 덧글(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