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의 바람

작년에 서울에 갔을때, 좀 제대로 먹고 살아 보겠다고 요리책을 서너댓권 샀는데, 그 가운데 한 권이 바로 이 책입니다. 기왕 글 써서 올리는 김에 제대로 식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자가학습을 시도하시거나 목적과 용도에 맞는 요리책을 찾으시는 분들께 도움이나 정보를 드릴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글을 올립니다.

이 책 ’20 기본 요리만 배워라! 요리 다 된다(헉헉…제목 한 번 겁나게 깁니다 -_-;;)’는 요즘 냄새가 나는 긴 책 제목에서 풍기는 분위기처럼 보다 신선하고 감각적인 요리책을 내놓아 차별화를 하기 위한 기획을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음식 전문가를 모셔서 한국 사람들이 잘 먹는 음식들을 종류 별로 묶어 가장 기본적인 음식의 레시피는 물론 비교적 자세한 요리법 및 재료 선택과 가공 기술(이라고 말하기 뭐하지만 이를테면 칼질이나 재료 손질법 등등입니다)까지 설명을 한 후, 그걸 바탕으로 기본 요리의 변주에 해당되는 나머지 요리들의 레시피를 비교적 간단하게 소개해줍니다. 이를테면, 기본적으로 밥을 위한 레시피들을 위해 쌀의 영양학적 가치부터 시작해서 쌀 씻고 불리기, 물의 양 맞추기, 불 조절하기, 뜸들이기 등등을 자세하게 기술한 다음, 흰쌀밥의 레시피를 기본으로 각종 변주인 콩나물밥, 오곡밥에서 캘리포니아롤의 레피시까지 소개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뉴욕, 매혹당할 확률 104%라는, 별 매력과 영양가 없는 여행기(이 책에 대해서는 언젠가 기회가 닿는대로, 아니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대로 글을 올릴 생각입니다…)를 내놓은 작가 내지는 삽화가 탄산고양이의 삽화와 디자인이 곁들여져 이 책은 아주 깔끔하고 쿨한 요리책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목도 왠지 멋져보이고, 의도도 좋고, 또 디자인도 뭐 그만하면 깔끔하고…해서 사들고 바다를 건너 온 이 요리책은 시간을 거듭하여 실생활에 적용을 하면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제가 생각하기에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책의 정체성이 저절로 발생하는 일종의 자가당착입니다. 책의 뒤표지에도 인용된 서문을 들여다보면, 초보자들로 하여금 무작정 따라하게만 만드는 레시피가 아닌, 하나를 배우면 응용도 할 수 있는 레시피들을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으니, 이 책은 당연 초보자를 위한 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책을 펼쳐 맨 처음에 나오는 쌀밥에 대한 레시피를 들여다보니 무려 네 쪽에 걸쳐 밥 짓기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쌀을 불려서 체에 받쳐 물기를 제거해서 또 밥솥이 아닐 경우에는 물을 어느 만큼 잡아서 불을 어떻게 조절해서 뜸은 또 이렇게…

제가 태어나서 이십여년을 살 때까지 제 손으로 밥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인데 어느날 갑자기 제 손으로 한 밥이 먹고 싶어서(보다 솔직하게는 엄마가 밥을 안 해놓고 나몰라라 외출하셔서… 나이 스무살 넘도록 엄마가 해준 밥을? 으음…) 밥 하려는 방법을 찾다가 인터넷이든 아니면 책에서든 이 레시피를 봤다면, 따라하고 싶어질까요? 제 생각에는 ‘아니, 뭐 밥 하는게 이렇게 복잡해(‘그러니까 엄마한테 효도 더 해야되겠네 밥 해줄 사람 만나서 결혼할 때까지~’ 라고 무의식중에 마초의 주문을 속삭일지도 모르죠)’ 라는 생각과 함께 좌절의 구렁텅이로 자신을 던지면서 바로 짜장면이나 피자 배달을 시킬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책이 안고 있는 정체성의 자가당착입니다. 보통 요리책들이 사진과 그에 대한 짧은 설명을 덧붙여서 따라하게금 만든다는 사실에 착안해 차별화를 위한 전략으로 이러한 기획 방향을 설정했을지 모르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진짜 음식을 만들고 싶어하고 막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흥미를 불어 넣어주기 힘들어 보입니다. 게다가 음식을 스스로 만들어 먹으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막 부모님 품을 벗어나 진학이나 취업을 위해 독립한 10대 후반 내지는 20대 초반, 아니면 뭐 갓 결혼한 20대 후반의 맞벌이 부부(30대임에도 불구하고 이 부류에 속하신다면 OTL)일 확률이 높을텐데, 과연 그들 가운데 누가 밥 맛있게 해 먹겠다고 바쁜 와중에 쌀 씼어서 30분 불렸다가 체에 받쳐서 물기를 뺀 다음 밥을 안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 대다수의 목표는 일단 가장 빠른 시간내에 적어도 먹을 수 있는 밥을 짓는 것이지, 옛날 조상님들 제사상에 올리는 메를 짓는 종가집 맏며느리의 정성과 노력(내지는 뭐 가부장제도의 가사노동고문이라고 하죠)과 같은 공을 들여 세상에서 제일 맛난 밥을 짓는 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전기 밥솥과 딸린 계랑컵이면 단 두 줄의 설명(쌀을 씻는다, 물은 주어진 계량컵을 이용 1:1에서 1:1.5 정도로 맞춘다)이면 밥을 지을 수 있는 요즘 세상에 체로 씼은 쌀을 받쳐 물기를 빼라는 요구는 좀 버겁습니다. 밥 해먹기 십 여년에 밥 짓기에 체를 써 본 기억은 저도 아직 없습니다(이 책 읽고 시도해 보려다가 정말 너무 귀찮아서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이 초보자 이상의 숙련도를 가진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요? 그러기에 이 책의 문제는 일단, 삽화라는, 사진보다 상대적으로 비 직관적인 매체를 통해 내용 설명을 보완하려 함으로써 요리 과정의 직관적인 이해도를 떨어뜨린다는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쌀밥을 기본으로 해서 만드는 응용 음식 가운데 알밥의 레피시를 보면 ‘3. 김치는 물기를 짜내고 잘게 송송 썰어 참기름과 깨소금, 약간의 설탕에 조물조물 무쳐둔다’ 라고 글로 설명을 하고 있는데, 과연 물기는 어떻게 짜내며 ‘잘게 송송’은 어느만큼의 크기를 말하는 것일까요? 또 ‘조물조물’은 어떻게 무치는 것일까요? 제 생각에 ‘잘게 송송’도 ‘조물조물’도 초보자의 요리 용어는 아닌 것 같은데다가 이 길고 장황한 설명보다는 사진을 두 장 곁들여 김치를 손으로 짜는 것 하나, 도마위에 썰린 김치와 사람 손이 같이 있는 것 하나로 이 과정을 설명한다면 훨씬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레시피는 그냥 말로 설명되어 있고, 조리과정이 간단한 종류가 별로 없는 우리나라 음식을 이 글로 된 것들만 따라가면서 만들기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초보자 이상의 숙련도를 가진 사람에게도 그렇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 책에 소개된 레시피를 따라서 몇 가지 음식을 만들어 봤는데 제 입맛에는 별로 맞지 않았습니다만, 그건 개인적인 취향이고 제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는 좀 거리가 있으므로 더 이상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삽화가를 고용해서 전체의 삽화와 디자인을 맡기는 것과 과정을 사진으로 찍는 것이 책의 기획과 제작비에 어떻게 차이를 가져오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책에 싣기 위해 음식을 직접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물론 레시피를 정리하기 위해 여러번 만들었겠지만 사진 촬영을 위해 만들 필요는 없었을테니까요. 사진을 찍기 위해 음식을 만들고 또 사진을 찍는 인건비가 아무래도 책의 단가를 책정하는데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까요?) 이 책이 사진으로 꽉 찬 책들과 맞먹거나 더 비싸다는 점은 솔직히 납득하기 어렵습니다(정가 1만 2천원).

그렇게 제가 느낀 모든 점을 종합해 볼 때, 적어도 저에게 이 책은 그렇게 추천하고 싶지 않은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책 역시 기획과 마케팅이 책의 질을 앞서는 요즘의 경향에 동참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라는 싸가지 없는 마음가짐을 떨쳐버리기가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by bluexmas | 2007/06/23 13:50 | Book | 트랙백 | 덧글(2)

 Commented by blackout at 2007/06/25 15:48 

제가 가장 실용적인 측면에서 마음에 들었던 요리책은 쿠캔에서 나온 “하나하나 처음부터 배우면 정말 쉬워요” 란 책입니다. 갓 시집온 새댁을 대상으로 쓴 책이라, 쉬운것부터 어려운것까지, 차근차근 나오거든요. 머, 새댁을 대상으로 했기때문에 가끔 닭살돋는 표현을 좀 참아줘야 하지만…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6/26 12:07 

그렇군요. 저는 맞벌이 부부인 부모님 밑에서 무려 10여년간 도제 생활을 해서 이미 기본기는 마스터를… 그런데 뭐 음식은 새댁만 해야 되나요? 완전 Sexist적 발상이 요리책에서도 넘쳐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