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 소외받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

한국에서 데려온 이 책을 고이 모셔 두었다가 어느 토요일, 엔진 오일을 갈러 카센터에서 지루하기 기다리는 와중에 읽기 시작, 바로 책에 몰입해서 단 두 시간 만에 다 읽고야 말았습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겠지만, 주인공을 비롯하여 캐비넷에 보관된 파일로 묘사되는 사람들은 사회로부터의 소외자들입니다. 각 화마다 사람들이 가진 이상 증세에 대한 이야기들이 다루어지지만, 궁극적으로 이들이 소수일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다수 안에 들기위해 가져야하는 마음가짐이 없어서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의 집합체로서의 사회는 소위 ‘사회생활’ 이라는 것을 잘하기 위해 필요한 덕목이라는 명목하에 개인적인 상식의 시스템으로는 차마 납득하기 힘든 행위들을 때로 요구합니다. 어떤 이들은 선천적으로, 또는 학습에 의하여 후천적으로 능숙하여 이 사회의 덕목을 잘 따라 사회에 걸맞는 인간, 즉 다수의 구성원으로 발돋움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어쨌거나 사회는 거친조직이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과 다르거나 조직의 방향에 발 맞추는데 그다지 능수능란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면 그때부터는 폭력을 선사하기 시작하는데, 그 폭력은 대부분 비물리적인 것이어서 교묘한 고통이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많은 부분에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는데, 그건 책에서의 표현이 상세해서라기 보다 그냥 현실을 떠다가 옮긴 수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책의 절정부는 전체의 구성을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약간 억지스럽게 끼워 넣었다는 느낌이 좀 들지만, 전체적으로는 정말 흡인력이 강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박민규의 ‘카스테라’도 그렇지만 이 책 역시 단지 웃기는 이야기로만 받아들이시는 분들은 거의 없을거라 생각하는데, 그 이유인 즉슨, 유머라는 것은 냉소를 바탕으로 해야만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살면서 어려움 한 번 겪어 본 적 없는 사람들은 남을 웃길 수 없습니다.

덧글: 원래 작가라는 분들이 말을 다듬는게 직업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과 다른 어휘나 표현, 혹은 문장을 쓰는 일이 허다하겠지만, 책 뒷표지의 평들 가운데 전경린의 ‘재기 넘치는 작품이다. 세상의 진실이 새로운 은유의 산도를 통과해 삶의 실체에 접근할 때, 예기치 못한 환기가 불러일으키는 낯선 조짐에서 정적을 느끼기 마련이다‘ 라는 문장은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것인지,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마치 잘못 번역된 철학서적을 너무 많이 읽어서 문장 만들기가 버릇처럼 그렇게 밖에 나올 수 없는 사람이 쓴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by bluexmas | 2007/05/30 13:46 | Book | 트랙백 | 덧글(12)

 Commented by 카렌 at 2007/05/30 14:04 

그 평에 저도 동감… 오랫동안 산 속에 계시던 분이 갑자기 등장해서 충격이었죠, 이 소설; 유머란 정말 연민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인 것 같아요. 그래서 진짜 유머가 드물죠.

 Commented by makondoh at 2007/05/30 14:54  

히히…대학 다닐 때 전경린 좋아했었는데 정말 저 문장은…히히히

우리 정우가 어려운 단어 몇 개 배워서 말하면 저렇게 될 듯…

 Commented at 2007/05/30 23:5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7/05/31 12:1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5/31 13:21 

카렌님: 뭐랄까 이 양반은 초탈한 분위기가 좀 풍겨요. 사진을 보니까 왠지 얼굴이 하루에 1mm 귀찮아서 이동할까 말까 한다는 게으름의 신 나무늘보 생각이 물씬 나는게… 하여간 박민규랑 누가 더 구라소설 잘 쓰나 싸움 붙여보고 싶더라구요. 그리고 진짜 유머는… 사실 cynicism에다 당의를 입힌(sugarcoated)게 아닐까 싶어요. 사실은 쓴건데, 쓰디쓴 인생의 경험에서 나온건데…

콘도야: 정우 사진 블로글에서 봤는데 다 컸더라. 미국 보내라… 그나저나 포스팅도 잘 안 하는데 이글루로 옮기지 그러냐… 덧글달기 힘들다. 그나저나 전경린은 난 이름만 예쁘다고 생각했지 관심 가져본 적은 없었더라구.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거고…

비공개 1님: 뭐든지 잘 보이겠다는 생각보다 진심을 말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면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주제 넘은 생각이… 예술이라는게 결국은 자기 세계를 내세워서 공감을 얻는 건데요 뭐.

비공개 2님: 그 에피소드 정말 웃긴데요?^^ 그나저나 책 빌려드릴까요? 참 그러고보니 전경린의 저 문장은 저만 싫어하는게 아닌가봐요. 보통 저런 번역체 내지는 말도 안되는 수동태를 사용한 문장은 오역으로 넘쳐나는 각종 사회과학서적들을 뜻도 모르고 경전처럼 모시면서 읽다보면 습관처럼 생기게 되는 듯… 제가 옛날에 어찌어찌해서 갔었던 모모 블로그에도 저런 투의 글 많아요. 그래도 ‘예기치 못한 환기’ 라니 뭔가 운이 맞는게 한국어 랩 같지 않나요? -_-;;

 Commented by 카렌 at 2007/06/01 07:17 

구라라면 셋이 붙여야 재밌죠. 이분하고 박민규, 천명관. 이렇게 셋이 붙으면 볼만할듯 🙂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6/01 10:50 

그렇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양반은 팬더에게 느리적댄다고 싸대기 맞은 늘보의 표정을 하고 계신게 좀 느릴 것 같아서…

 Commented at 2007/06/01 12:2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6/01 13:45 

비공개님: 앗 그러시군요. 약간 고민이 되는 상황인데요 솔직히… 사실 돈은 별로 신경 안 쓰는데 책이 멀리 오랫동안 가는 것이…음…

저한테 며칠만 시간을 주시겠어요?^^

 Commented at 2007/06/03 01:3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은사자 at 2008/07/13 19:09 

덧글보고 놀러왔다가 지금 2시간째 여기에 상주중이예요… 구라발 센 소설이 너무 고팠는데 이 글 읽다가 캐비닛이 너무 보고 싶어졌어요. 계속 심각하게 읽고 있다가 전경린 씨의 문장이랑 “이 양반은 팬더에게 느리적댄다고 싸대기 맞은 늘보의 표정을 하고 계신게 좀 느릴 것 같아서”라는 덧글보고 크게 웃어 버렸어요. ㅎㅎㅎ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7/14 12:53 

덧글을 달려고 옛날에 쓴 이 글을 자세히 읽다가 보니, 이 책 작가가 김언수였네요. 전 박민규인줄 알았어요. 그래서 박민규의 핑퐁을 읽고 쓴 글에 보면 전작 ‘캐비넷’과 마찬가지로…라고 썼네요. 이런 개망신이…전 정말 언젠가 팬더랑 늘보랑 싸우는 거 보고 싶어요. 느린동작 분석이 필요 없을 것 같죠? 다들 너무 느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