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끝은, 가끔 빛
시가 넘어서 야근을 끝내고 같이 일하는 선배와 아주아주 늦은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 왔습니다. 원래 점심 도시락을 늘 싸가지고 다니는데, 보통 야근모드로 접어들면 저녁도 싸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오늘도 사무실 냉장고에는 저녁이 있었습니다. 그래봐야 저 아니면 아무도 먹지 않는 샌드위치 쪼가리에 뭐 사람들이 소냐고 놀리는 각종 풀때기(저에게 풀때기라는 표현과 마음의 상처만을 안겨주고 도망간 사람이 생각나는군요. 풀때기만도 못한 사람같으니라구..)였지만… 그러나 그 같이 일하는 선배는 도시락을 안 싸오니까 혼자 나가서 드시라고 하기도 뭐하고 해서 새로 연 근처의 중식당을 같이 갈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는데, 제 3자(남, 55세)의 무능력함이 저와 선배의 스케쥴 및 능률을 압도하는 바람에 금요일날 저녁까지 회사에 몸바쳐 헌신하기로 했던 저와 선배는 그야말로 쫄쫄 굶으며 일을 했던 것입니다.
어제 글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낮에는 시베리아 같은 사무실은 저녁에 에어콘을 끄면 바로 아마존 옆 동네로 변신하기 때문에, 열 두 시간 이상의 모니터 응시와 도면 그리기 노동, 그리고 카페인과 이산화 탄소 과다는 열대 우림과 같은 사무실의 기후와 시너지 효과를 발현, 아주 심각한 두통을 빚어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회사 앞의 미술관(Richard Meier+Renzo Piano의 High Museum)으로 바람을 쐬러 나간게 저녁 여덟시쯤? 미술관 앞 마당에서는 사람들이 모여서 술도 마시고 얘기도 하고, 또 조촐하지만 생음악도 있는데 저는 야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젠장, 갑자기 우울해지더군요. 그것은 금요일이라서, 혹은 지금 이 일을 하기 싫어서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정말 잘 끝내고 싶은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거기에 딴지를 거는 걸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하여간,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열대우림 옆 동네에 올라왔는데, 언제나 부처님 가운뎃토막 싸대기를 때릴만큼 인자한 선배 역시 무능력자의 만행에 분을 삭히지 못하는 것을 발견, 그와 저는 좁은 빌딩 복도에서 서로를 차마 마주 보지도 못한채 분노의 눈물을 흘리다가 30분 후 그를 남겨놓고 회사를 떠났습니다. 저녁을 먹고, 선배를 댁까지 모셔다 드리고 오는 길에 성취감은 예전보다 희미해서 저는 마음이 그리 썩 편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둠의 끝은 빛이어야 되는데 이번에는 다시 또 다른 어둠이거나, 아니면 빛이 생각보다 희미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니 반기는 것은 설겆이 못해서 쌓여있는 그릇과 각종 고지서와 먼지와 쓰레기와…거기에 내일의 결혼식에 갑자기 가기 싫어지는 무거운 마음이 겹쳐서 술이라도 한 잔 먹고 잠을 청해야 겠다는 생각이 계속 드는 열 두시 오십 이 분, 그래도 냉장고에 라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저를 성냥개비 대가리만큼 기쁘게 만드는 금요일 밤입니다.
# by bluexmas | 2007/05/19 13:53 | Life | 트랙백 | 덧글(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