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 지옥
가끔, 죽어서 지옥에 반드시 지옥에 가야 한다면 요리 지옥(이건 뭐 땡큐죠)이나 빨래 지옥, 그리고 백 번 양보해서 청소 지옥까지는 갈 수 있어도 정원일하는 지옥에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어릴때는 관련 업종에 종사하시는 아버지 덕분에 많은 화분들을 집에 거느리고 살았었는데, 이것들이 다 손이 많이 가는 종류들이어서 주말마다 애를 먹었던 기억이 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자 살면서도 집에 화분하나 들여 놓았던 적이 없었는데, 정말 손바닥만큼도 안되는 마당이 딸린 집으로 이사오게 되고 봄이 찾아오니 드디어 정원을 손봐야 할 때가 되면서 주말이 생지옥으로 변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습니다.
집으로 이사오기 전부터도 늘 이맘때면 텔레비젼에 쏟아져 나오는 각종 제초제며 살충제 광고를 보면서, 반드시 저렇게 농약 범벅을 해서라도 푸른 잔디밭을 가꿔야 하는지에 대한 잡초같은 반감을 가져왔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그런 것들을 쓰지 않고 잔디밭을 유지하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날이 풀리고 잔디보다 더 빠르게 잡초들이 파란 머리를 내밀기 시작하자 저는 열심히 그놈들을 뽑아내기 시작했죠. 이러다보면 놈들도 질려서 내 잔디밭에는 뿌리를 내리지 않겠지- 라는 순진한 바램과 함께.
그러나 잡초들이 죽순보다 빠르게 자라나기 시작하고 그와 발맞춰 단지 관리 팀으로부터 잡초가 많다는 경고 편지를 받자 저도 눈물을 머금고 유기농 잔디밭을 가꾸려는 꿈을 포기하고 살충제와 제초제 구입을 위해 Home Depot로 향해야만 했습니다. 뭐 이런 분야에 대해서는 완전 까막눈인데다가 뭔가 알고 싶은 욕구도 없기 때문에 광고에서 본 그런 것들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을 살 생각이었는데, 마침 지금이 정원 관리를 시작하는 시기라 그런지 직원들이 나와서 이런 저런 충고도 해주고 제품도 권해주더군요. 그래서 토요일 오후 몇 시간을 비료와 제초제 투입, 그리고 나무 밑둥 부분에 깔린 나무껍질(mulch라고 합니다)을 교체해주는데 썼습니다. 이걸 시작해보고 나니까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 그리고 노력 및 노동력이 여기에 허비 되어야 할지 대강의 윤곽이 잡히면서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습니다. 말하자면 나이 서른 둘에 집을 사고 나니 새로운 지옥문이 열린 셈이지요. 6개월 동안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나무들을 둘러보니 다들 영양상태가 좋지 않은지 가지 끝이 누렇게 타 들어 가고 있어서 뭐랄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원해서 심은 것도 아니고 단지를 지을때 일괄적으로 받은 것들이기는 하지만 주인을 잘못 만나서 세상을 일찍 뜰 수는 없는 노릇… 이제 대강 뭐가 더 필요한지 알았으니 다음 주 주말에는 필요한 장비들을 더 사서 최소한 죽지는 않도록 관리를 해줄 생각입니다. 죽으면 더 골치 아파지는게, 같은 것들을 사다가 다시 심어야 되니까 일이 두 배로 많아지는 셈입니다.
그렇게 정원 관리와 장보기로 토요일을 날리고, 간만에 대청소와 밥 및 빨래로 일요일을 날리고 나니 금요일 저녁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던 일들과 블로그에 올리려고 했던 최근에 본 영화에 관한 글들은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 최소한 잔디에 물 주는 사이에 수도꼭지라도 잠궈 줄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물 주다가 말고 다시 수도꼭지까지 뛰어가서 잠궈야 되는 불편함은 없을텐데.
# by bluexmas | 2007/04/30 12:15 | Life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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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c님: 아실라나 모르겠지만 연말에 단 한 번 텔레비젼에 나와서 쇼를 하고 일억씩 받는다는 트롯트계의 악성 나훈아님의 유명한 노래 가운데 ‘잡초’ 라고 있죠. 뭐 이름도 없는 잡초라고 노래에서는 그러지만 다들 나름 이름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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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1님: 디자인 계통에 종사하고 계신 듯? 프리랜서일 확률이 80% 정도?
운동은… 달리기와 웨이트 포함한 풀 코스입니다요. 한 시간 반씩 일주일에 네 번.
USB를 꼽아서 그랬다면, 너무 많은 장비를 연결해서 그런걸까요? 자체 전원이 없는 USB장비라면 그럴지도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