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 중독의 기원

1996년 4월 셋째 아니면 넷째 주, 처음으로 교장 교육을 나가는 길에 주변은 온통 딸기밭이었습니다. 4월 이맘때면 딸기가 제철일 때니까 대체 그 냄새가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만들던지… 그러나 저는 먹는 건 고사하고 흘리는 침조차 아껴야 했습니다. 왜? 그 처음으로 나갔던 교육이 바로 화생방이었으니까요. 뭐 군대 갔다오신 분들은 다 알겠지만 어차피 방독면 써도 요즘 화학 무기로는 10분안에 죽을텐데, 그것도 모자라 더 빨리 죽는 연습을 시키려는지 가스를 피워 놓은 건물 안에 들어가면 방독면을 벗어야 합니다. 그러면 벗자마자 눈물, 콧물, 그리고 침이 서로 누가 누군지도 분간 못할만큼 질질 내지는 겔겔 흘러 나오는데, 이걸로 건물 바닥에 이름을 써야 내보내주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전에 침이 말라서는 안되는 것입니다(그래서 이름이 넉자인 사람들, 뭐 남궁철수-옥분씨는 여자니까 면제!-랄지 김 새봄결 같은 분들은 이름도 채 못 써보고 장렬히 전사하는 경우가 많다고…그래서 항상 훈련소에서는 이름이 외자인 사람들을 넉 자인 사람들 옆에 붙여주고 전우애 강조 교육을 시키곤 했습니다. 자기만 다 썼다고 홀랑 뛰쳐 나오지 말고 옆에서 고생하는 넉 자들 한 자씩 써주고 사이좋게 어깨동무 하고 같이 나오라고^^ 전사하면 보상금 많이 나가잖아요… 전우애도 강조하고 돈도 아끼고-_-;;; ). 하여간 그래서 흘릴 군침조차 아껴야 했던 훈련병 신세는 정말 서러웠더랬습니다. 하여간 그렇게 열심히 흘려서 바닥에 이름 쓰고 훈련소(참고로 저는 논산 군번…)로 돌아오는 길에는 또 다 말라버려서 역시 군침조차 흘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딸기 냄새는 오전보다 더 강렬하더군요. 그래서 ‘훈련이 끝나서 외박 받아 나가면 반드시 딸기를 먹고 말겠어’ 라는 굳은 결심으로 그 모든 훈련을 모질게(참고로 그때는 100kg에 고혈압으로 현역으로 온게 기적적인 저주라고들 했습니다) 견뎌내고 외박까지 받아 나갔건만, 5월 말이면 딸기는 이미 사람들의 뱃속으로 사라진 뒤 잔여물은 하수도를 거쳐 다음해의 딸기 내지는 훈련병을 위한 밑거름으로 유용될 준비를 마치는 바, 저는 그 해 딸기 이파리 조차 입에 넣어보지 못했고, 그때의 피눈물 나는 기억은 저를 딸기 중독으로 만들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봄이 돌아오면 truffle을 찾아 헤매는 돼지처럼 바람에 실려 다니는 딸기 냄새를 열심히 쫓아 다닌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그러나 쫓아 다니기에 딸기는 트러플보다 너무 싸구려군요. 이 돼지만도 못한 신세라니…).

내일, 4월 12일은 입대 11주년이 되는 날이기에 기념삼아 글을 올립니다. 사진은 지지난주에 5천원인가 주고 샀던 딸기 3.6kg(8 lb)였습니다. 딸기씨(인터넷을 찾아보니 보통 크기의 딸기 하나에는 씨가 200여개 있다네요. 역시 정보화 사회에는 안 알려진 게 없습니다)만큼 거짓말을 보태서, 저만큼 딸기 사다 놓고 그 주에는 밥이랑 딸기만 먹었습니다. 된장 풀어서 딸기 국도 끓여 먹고, 갈아서 고추장이랑 섞어서 밥에 비벼도 먹고(물론 반주는 언제나 딸기주!)… 물 좋은 조기가 있으면 반으로 자른 딸기를 바닥에 깔아서 같이 조림을 만들어 먹으면 둘이 먹다가 옆엣놈이 토하면 멀쩡하게 먹던 놈도 비위 상해서 마주 보고 토할만큼 맛이 아스트랄합니다. 하여간  뭐 이렇게 미친 듯이 딸기를 좋아해도 우유는 흰 우유만, 아이스크림은 초콜렛만 먹습니다. 그리고 딸기무늬 빤쓰는 더더욱 안 입습니다. 아, 나라를 위해 내 한몸 초개와 같이 버릴 각오를 아침마다 다지며 일어나던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1년이라니, 세월 참 빠르군요.

 by bluexmas | 2007/04/13 11:53 | Life | 트랙백(1) | 덧글(14)

 Tracked from 이오공감의 흔적 at 2007/04/14 12:00

제목 : 2007년 4월 14일 이오공감

취업률의 비밀  by oldman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본인은 한때 행정조교일을 했었습니다. 작년 이맘때 즈음이었겠군요. 취업률을 조사하는데 계장님께서 꽤나 난감한 것같기도 하고 황당한 것…PD수첩 ‘맨발의 기봉이’의 충격적인 진실  by 수롤그는 모든 내역을 가지고 있다며 떳떳함을 주장했으나, 책 출판계약에 대해서는 계약금을 받은 사실이 없고 잘 모르는 사안이라 그냥 기봉이에 관한 책을 썼다기에 구두로…세계 최초의 사이보그  by Su……more

 Commented at 2007/04/13 12:2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7/04/13 12:3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유 리 at 2007/04/13 12:38 

안녕하세요, 밸리에서 보고 들어왔습니다. 참 가슴 아픈 사연이군요(…). 그런데 딸기국이나 딸기 고추장은 농담이시죠… …?;;; 생각만해도 속이 안 좋아지는 조합인데요. ;;

참, 링크 신고 합니다. 😀

 Commented by 유클리드시아 at 2007/04/13 17:23 

딸기무늬빤스에서 …OTL

 Commented by 가이우스 at 2007/04/13 18:39 

제 친구도 논산출신인데 같은 말을 하더군요. 휴가나와서 꼭 딸기먹고 말겠다고…

참고로.. 전 306 보충대고.. 사단훈련병에다가 겨울이라서…그런 경험 없습니다만

철원근처라.. 고기집이 많아서.. 이동갈비가 무척 먹고 싶더군요.. 문제는 비싸다는 것이..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4/14 10:13 

비공개님:들러 주셔서 감사하고 봄인데 입맛 떨어질때마다 들러서 ‘야금야금’ 즐겨주세요^^

유 리님(스페이스 개수가 맞나요?): 뭐 별로 가슴 아픈 사연은 아니죠. 살다보면 다 그렇고 그런게… 딸기국은… 사실은 고추장을 넣고 끓여야 제맛이랍니다-_-;; 딸기 고추장은 수퍼마켓에 있는 걸 봤어요.

유클리드시아님: 옷장을 뒤져보니 철 지나고 세일할때 산 눈사람 무늬는 있던데요?

가이우스님: 뭐 훈련병에게 고기는 기본 아닐까요? 논산 훈련소에 급식되는 고기는, 제가 있을때는 뭐 88올림픽 기념으로 냉동시켰다 나온거다, 라는 소문도 있었답니다.

 Commented by 이상한앨리스 at 2007/04/14 13:38 

저도 1월 부터 주말마다 마트에서 딸기만 사다 먹습니다..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아요. 특대를 사곤 하는데 3.6kg짜리도 생각을 해봐야 겠습니다. – -;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4/14 14:37 

앨리스님: 어느 잡지에서 읽었는데, 딸기가 오염이 많이 되어 있는 과일 가운데 하나니까 유기농을 먹던지 아주 잘 씻어 먹어야 된다고 하더라구요. 아, 그리고 저처럼 3.6kg을 사시면 보관하기 힘드니까 딸기 피클을 만드는 것도 한 번 생각해보세요. 레시피는 비공개로 메일 주소를 남겨 주시면 제가…

참, 지난 부활절에 출장 나간 토끼들 다 돌아는 왔나요? 우리 동네에도 몇몇 애들이 월요일 저녁까지도 술취해서 돌아다니던데.

 Commented by Nomad at 2007/04/14 14:44 

저는 97년 4월에 논산에 입대했습니다. 그 강렬한 딸기 냄새가 지금도 기억납니다.

딸기 고추장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설탕대신 딸기를 넣었습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4/14 14:58 

Nomad님: 저의 아들 군번이시군요^^ 저희 소대에 아들들이 대여섯명 되었는데, 참 끔찍히도 아껴 주었던 기억이… 정말 논산에서는 딸기하고 조교인 대학 동기한테 얻어 피웠던 담배 밖에 기억이 안 나요.

그리고 딸기 고추장은, 진짜 있죠…

 Commented by Beatriz at 2007/04/15 08:10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네요. 아줌마들이 모이면 애 낳을 때 얘기, 남자들 모이면 군대 얘기 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데, 우스갯소리로들 그러지만 둘 다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극단적인 경험인지를 말해주는 듯 해요. 봄날 달콤한 딸기 많이 드시고 행복하시기를.. ^^ 생선에 조리지는… 마시고 -.-;;;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4/15 09:14 

안정숙님: 군대는 사실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한국 젊은 남자들 트라우마의 온상일 뿐이죠. 내지는 Macho incubator거나… 통제와 억압의 기억은 사실 추억이 될 수 없거든요.

Beatriz님: 가슴이 아픈 이야기일까요? 극단적인 경험이라는데는 동감입니다. 오늘도 장보러 나가서 딸기 사왔는데, 정말 싱싱하더라구요. 생선을 조릴때는 무나 감자를 깔테니까 걱정 안 하셔도…^^

 Commented by five at 2007/04/16 02:04 

완전 공감 중….;;;

저도 4월 중순에 논산훈련소로 입대를 했었거든요.(4일전 전역)

화생방 훈련받으러 가는데 주변 비닐하우스에서 나는 딸기냄새가 진동해서 저도 거의 미치기 직전이었던 기억이나네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4/16 12:02 

five님: 전역 축하드립니다. 요즘은 2년으로 줄었나요? 고생이 많으셨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