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ewall(02/11/06)- 포드 옹, 은퇴하시지요.
산과 바다와 호수, 모든 자연이 어우러져 풍광좋기로 둘째라가면 서럽지만 주룩주룩 내리는 비 때문에 뿌리박고 살기 꺼려지는 도시 시애틀에서 우리의 영웅 강박증에 걸린 포드옹은 합병을 앞둔 은행의 보안 책임자입니다. 시 외곽의 호수가에 건축가인 마누라가 디자인한 멋진 집, 그리고비싼 캐딜락까지… 이렇게 다 갖추고 살면 반드시 시기와 질투로 무장한 자들이 나타나야 영화를 만들 건덕지가 생기는 법, 여느때처럼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포드옹의 가족들은 그 멋진 호수가의 주택에서 인질로 잡히게 되고 괴한들은 보안 시스템을 누구보다도 잘 알는 그에게 돈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지만 늘 끈덕진 캐릭터로 등장하는 포드옹은 이번에도 어떻게 해서든 그 특유의 원맨쇼로 모든 상황을 혼자 해결하고 가족들을 구하고자 갖은 애를 씁니다.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지난 몇 년 동안 해리슨 포드가 출연했던 ‘Air Force one’이나 ‘The Fugitive’ 같은 영화와 별반 다를 것이 없이 철저하게 포드옹을 위해 기획된 영화입니다. 따라서 그가 보안책임자든 학교 선생님이든 기둥서방이든 그에게는 변함없이 엄청난 규모의 위기가 찾아오지만 어쨌거나 모두 그의 능력으로 극복되고 평화는 어김없이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정서가 되는 것입니다. 네, 물론 저도 해리슨 포드를 싫어하지 않고 또한 그가 출연한 전작들을 즐겨 보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포맷의 이 영화가 저에게 엄청난 실망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일단, 나이 먹은 그가 이 영화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때마침 제가 사는 동네의 무가지에 그의 인터뷰가 나와서 읽어보니 그의 나이 어느덧 예순 셋… 배우에게 나이가 무슨 문제가 있겠냐고 저를 반박할 사람들도 많겠지만, 영화를 보면 그 얼굴에 가득한 주름이 도저히 그가 전작들에서처럼 정말 활기차게 위기 극복을 위해 몸을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저 강박증처럼, 그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꼭 이런 영화를 찍어야만 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각본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서 나이가 예순이든 일흔이든 여든이든 그 많은 방법들을 놓아두고 반드시 몸을 날려 모든 위기를 극복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포드 옹…그러니까 이 영화는 배우로서 변신을 원하지 않는 그가 선택한 매너리즘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고 그러한 티가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나기 때문에 도저히 흥미를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짤막한 인터뷰에서, 그는 왜 폴 뉴먼 같은 변신을 시도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저 “나는 나일 뿐이고 이런 영화와 역할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라는 비교적 단순한 대답으로 그 모든 것이 그의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사실 폴 뉴먼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가 충분히 실망스러운 이유는, 이 영화는 많은 가능성을 가진 시나리오를 택했음에도 그의 고집으로 말미암아 이런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티가 팍팍 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컴퓨터나 그에 관련된 해킹, 또는 보안 문제를 주제로 삼은 각본이 이제는 비교적 흔해졌다고는 하지만, 이 영화에는 피튀기는 총질과 차량 추격전,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곡괭이 뒤로 날려 악한 찍어 죽이기 같은 필살기 없는 지적인 스릴러물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깊어진 주름 만큼이나 깊었을 그의 아집의 골은 이 영화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예측 가능한 클리셰의 범벅으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현란한, 그리고 성룡만큼이나 몸을 아끼지 않는 격투장면은 금새 절정으로 치솟아 그의 영웅만들기에 한치의 늘어짐도 허락하지 않으며, 차도, 총도, 혹은 그 어떤 기술의 산물도 사용하지 않은채 오직 주먹만으로 자기보다 20살은 더 어린데다가 머리 하나가 더 큰 납치범과 맞장을 뜨던 포드옹은 약간의 핀치에 몰리다가 때마침 그 자리에 있어준 고마운 곡괭이로 자기와 가족들에게 시련을 안겨준 범인을 처절하게 응징합니다. 그리고 다섯달이나 주룩주룩 내리던 비마저 그쳐 그 아름다운 풍광이 찬란하게 드러나는 시애틀 외곽의 어느 시골동네 호수가에서, 격투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불편해보이는 정장차림의 포드옹은 극적인 음악과 함께 가족을 얼싸안고 승리의 기쁨을 나누며 관객들을 향해 그렇게 말합니다. ‘주름 때문에 제 액션을 보기가 너무나 부담스럽다면, 다음 영화에서는 꼭 보톡스를 맞고 찍으리다’ 라고.
# by bluexmas | 2006/02/24 12:22 | Movie | 트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