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ch Point (01/21/06)- 찰나에 갈리는 행운과 불운에 관한 이야기
작년 말 Brokeback Mountain을 볼 때, 영국 액센트를 쓰는 선남선녀들이 떼거리로 나오는 영화의 예고편을 보게 되었습니다. 분명 런던을 배경으로 찍었을 그 영화의 넘쳐나는 선남선녀들 가운데에서도 유난히 눈에 뜨이는 금발 미녀가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Scarlett Johansson이었던 것입니다. 늘 심심풀이로 영화를 보면서도 무식쟁이의 굴레를 벗지 못할 것이라는 우울한 운명의 그림자에 압도되곤 했었지만, 요즘 그렇게 잘 나간다는 그녀를 대번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저는 정말 끝간데 없이 부끄러워해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반성차원으로 그날 당장 ‘Lost in Translation(2003)’의 DVD를 사다 보았고, 역시 그녀가 나오지만 너무나도 구리다는 평 때문에 감히 ‘Island’는 건드려 볼 엄두도 내지 못한채 오늘 이 영화 Match Point를 보게 되었습니다.
스포일러를 제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대강의 줄거리만 소개하자면 영화는 이렇습니다. 별로 가진 것은 없지만 패기 넘치는 아일랜드 출신 테니스 티칭 프로 Chris (Wilton, Jonathan Rhys-Meyers 분)는 런던 초상류층의 테니스 클럽 에서 레슨을 하는 도중 또래인 Tom (Hewett, Matthew Goode 분)을 알게 되고, 그와 가까워짐으로써 톰이 속한 그 상류층에 합류할 수 있는 행운을 거머쥐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행운이 거저로 찾아 오지는 않는 법, 톰의 여동생인 Chloe (Emily Mortimer 분)와 가까워짐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자동적으로 확고히 하고자 하던 크리스는 탐의 약혼녀였던 미국인 배우 지망생 Nola(Rice, Scarlett Johansson 분)에게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하여 둘은 불륜이라면 불륜인 관계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해나가지만 놀라는 시간이 흐를수록 크리스가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에게 올인하기를 종용합니다. 그러나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법, 크리스는 어느 한 쪽으로도 방향을 잡지 못한채 불안한 외줄타기를 계속하고 크리스와 놀라의 긴장감은 증폭되기만 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놀라가 자신의 아이를 가짐으로써 관계가 돌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크리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로 결정합니다.
테니스에서 승자가 결정되는 마지막 1점을 의미하는 Match Point라는 용어를 제목으로 삼은 의미를, 우디 앨런은 영화 첫 머리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랠리가 오고 가는 와중에 공이 네트 위에 걸리는 순간이 있는데, 그 공이 상대방 쪽으로 넘어가면 나의 승리, 그 반대일 경우 상대방의 승리가 되는 것이고 그것은 순전히 운에 의해서 결정된다(언제나처럼 잘못 들을 우려는 상존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두 가지 운의 축, 즉 행운과 불운의 축에 얽혀 상반된 삶의 궤도를 갈 수 밖에 없는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영화의 남자 주인공 크리스는 영국도 아닌 아일랜드 출신으로, 별달리 가진 것도 없지만 천성적으로 타고난 용모를 비롯한 인간적인 매력으로 좋은 기회를 거머쥐게 되고,또한 그 역시 기회에 딸려오는 기대에 잘 부응함으로써 자신의 길을 닦아 나갑니다. 그리하여 커지는 그의 행운은 그가 저지른 악행마저도 궁극적으로 덮어주며 그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을 것이라는 무언의 확신을 안겨줍니다. 반면 가족을 떠난 아버지와 알콜중독자인 어머니 밑에서 우울한 어린시절을 보낸 놀라는 아름다움을 타고 나지만, 그에 딸린 그늘이 그녀의 삶을 짓누르는지, 그녀 몫으로 예정되어 있었을것만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계속 겉돌기만 합니다. 그러한 실패 끝에 약혼자로부터 버림받게되는 그녀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한 사람을 찾음으로써 마음의 안식이라도 얻기를 바라고 또 그녀가 가진 아이가 그걸 가져다 줄 것으로 믿지만, 그렇게 그녀가 안식을 주리라 믿었던 사람은 결국 그녀에게 영원한 안식을 아주 비극적인 방법으로 제공함으로써 그녀의 불운한 삶에 확인 사살을 위한 총알을 박아버리고 맙니다.
사실 제 몇 번에 걸친 제 포스팅을 계속해서 보신 분-이 대체 얼마나 계신지 모르겠고 저도 너무 게을러서 보는 영화들에 대한 포스팅을 채 절반도 하지 못하지만…-들이라면 제 영화에 대한 얕디 얕은 기본 지식을 대강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우디 앨런이라면 그 난리 끝에 자신의 양녀 수니 프레빈과 결혼한 늙은 뉴요커 영화감독으로 밖에 기억하지 못하는데다가 그의 영화라면 더더욱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영화가 우디 앨런이 그 동안 가지고 있었던 영화에 대한 철학을 대체 어떻게 펼쳐 내었는지 읽어낼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20여분이 빚어내는 뒤틀린, 상식과 반하는 결말을 보면서, 그가 궁극적으로 관객에게 제시하고자 의도했던 메시지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선징악을 향한 동경에 대한 조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특히 저 같이 평생 행운따위 따를 운명이 아니니 남들과 같은 성공을 거두려면 더 많은 노력을 해야한다고 믿고서 우울해하는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실패가 자신의 뒤통수를 칠 때마다 늘 열심히 노력하는 데다가 ‘비교적’ 바르게 살고 있으니 언젠가는 늘 바라던 좋은 결과가 오리라고 끝없이 자위하면서 살지만 그런 ‘좋은 날’ 대한 환상은 어쩌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난 삶이 제공하는 끝없는 속임수의 덫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법, 결국 우리가 사는 삶은 영화의 누구처럼 계속 불운이 날리는 잽을 맞아 주다가 마지막의 스트레이트 결정타-말하자면 복싱의 매치 포인트와도 흡사한-로 죽음을 맞아 세상을 떠나는 와중에서야 지금까지 속아 살았다고 깨닫게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여간 말이 앞뒤도 안 맞게 너무 길었는데, 결국 제 생각으로는 우디 앨런은 이 영화를 통해 저 같은 사람들에게, ‘삶에 속지 마라, 니들의 삶도 이것과 별 다를 바가 없으니…’ 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이죠.
하여간 대체 어떤 운의 축에 제 삶이 놓여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지만, 설사 불운의 축에 제 그것이 놓여 있음을 이 영화를 보고 깨닫는다고 해도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을만큼 영화는 재미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스칼렛 요한슨을 비롯한 선남 선녀들이 줄줄이(사실은 그래봐야 주인공들 넷에 불과합니다) 나와주는데, 이들은 그 잘난 얼굴과 캐릭터에 맞는 연기를 보여줌으로써 영화에 발탁된 이유가 단지 얼굴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또한 스칼렛 요한슨은 누군가 홀딱 빠지게 만듦으로써 남자 하나, 혹은 여럿이라도 인생 망치게 하는 것 쯤은 일도 아니라고 몸으로 말해주는 요부(妖婦, Femme Fatale)역을 비교적 잘 소화하지만, 어느 매체의 리뷰에서 지적한 것처럼 조금은 단편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영화 속에서 역할의 비중이 생각보다 작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울한 배경 속에서 성장한 등장인물로 설정되어 있으니만큼 조금 더 다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나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평범한 애정영화처럼 시작했다가 스릴러물처럼 변신하는 척 해서 약간의 공포감을 안겨주었다가 얼른 만회하려는 듯 양념처럼 코믹터치를 품은 채 영화는 막을 내리지만 두 시간을 꽉 채우며 흘러가는 내내 영화는 그 팽팽한 긴장감을 거의 잃지 않습니다. 단, 막판에 곁들여진 코믹 터치는 저에게는 사족처럼 느껴져서 오히려 영화 내낸 그렇게 흐르던 일관성이나 긴장감을 흐트러뜨린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디 앨런의 영화를 많이 보신 분들이라면 분명 다르게 느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여간 12월 내내 계속해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극장에 가는 자체에 주눅이 들어있던 저에게 이 영화는 올 한해 내내 저의 극장행을 독려할 흥미진진한 영화였습니다.비록 아름다운 그녀가 코 위로는 잘려서 아쉽기는 하지만, 미니멀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깔끔하게 디자인된 포스터가 정말 마음에 들던데 하나쯤 사다가 걸어 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 by bluexmas | 2006/01/22 14:25 | Movie | 트랙백 | 덧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