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생일에 나는

1994년: 그래도 객기라는걸 눈꼽만큼은 가지고 있던 새내기 시절, 저한테는 그 눈꼽만큼의 관심조차 없던 누군가에게 나올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객기를 부려놓고 대학로에서 시간을 죽였지만, 그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고 저는 그 눈꼽의 댓가를 혹독하게 치뤘더랬습니다.

1995년: 역시 대학로, 누군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누군가와 맛없는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나 저나 아마 서로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는데 단지 시간을 때울 사람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몇 년 후 다시 만났는데 30초간 벌쭘했습니다.

1996년-1997년: 군대에 있었는데, 이맘때쯤이면 군종병 파견을 나가서 성당에 머물렀습니다. 군생활을 회피하려 했던 것이겠지요. 그래도 행사준비다 뭐다 해서 보람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98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1999년: 역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집에 있었던가?

2000년: 역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싸웠을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이유로.

2001년: 강남역 TGIF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말도 안되는 손님 접대에 짜증이 나서 영수증을 복사해서 사장한테 환불해달라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뒤로는 다시 발도 들여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마 막판에는 싸웠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생일은 축하하기 위해서라도 싸워야만 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2002년: 하루 종일 도로를 달리다가 극장에서 ‘Analyze That’을 보았습니다. 영화는 별 재미없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2003년: 차를 몰고 시카고 여행을 갔었습니다. 당일에는 밀워키까지 올라가서 Miller Park를 보고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어둠은 우리의 등을 떠밀었고, 저는 아무 이유 없이 불안해서 90마일까지 밟았더랬습니다.

2004년: 어쩔 수 없이 서울에 머물면서 델리 형들의 공연을 보았는데, 형들이 이제는 매너리즘의 멍에를 벗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우울함을 느꼈습니다.

2005년: 김장했습니다.

내년은 좀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by bluexmas | 2005/12/26 18:32 |  | 트랙백 | 덧글(2)

 Commented at 2008/12/27 12:3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12/27 13:43 

그, 그러게요. 이 글,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실마리는 있으니 추측은 맘대로 하시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