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났다 사라진
…어제는 새벽 네 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 수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동안 친구들이랑 너무 수다를 열심히 떨어서 격앙된 감정 때문이려니 생각했는데, 따져보니 회사의 파티에서 미친 듯이 디저트를 먹은 뒤 마신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티가 너무 독했던 탓이었습니다. 다시 물을 부어 넣기 귀찮아서 나중에는 거의 티백을 빨아먹다시피 했으니까요. 그리하여 잠이 모자른 채로 회사에 갔습니다.
오늘같이 회사에 가야 하는 날은 사실 일요일이라기 보다는 작은 월요일과 같습니다. 일단 아무 생각 없이 늦잠을 잘 수있는 기회를 원천 봉쇄 당하기 때문에 아침부터 짜증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사람들이 나오겠다고 한 시간에 맞춰야 되기 때문에 출근 시간이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래서 서두릅니다. 서두르면 꼭 뭔가 빼먹습니다. 운전을 해서 회사에 반쯤 다다르면 그제서야 뭘 빼먹었는지 생각나곤 합니다. 늘 그런 식입니다. 또한 느긋하게 집에서 점심을 먹을 수도 없고 소파에 앉아서 기타를 치면서 푸드채널을 볼 수도 없고… 그리고 내일은 월요일입니다. 즐겁고 희망찬 한 주의 시작. 그리고 데드라인과 빨간펜 선생님과 야근과 같은 삶의 활력소, 또 그게 끝나면 기다리고 있을 짝 없는 예수님 생일, 그리고 변함 없이 다가오는 새해와 그에 수반하는 피할 수 없는 노화.
그리하여 회사에 도착도 하기 전에 지쳐버린 저는 이어폰을 꽂은 채로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요즘은 일이 아무리 단순해도 음악을 들으면서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생각을 하면서 해야만 되는 것인데, 음악을 들으면 머리는 음악을 쫓고 일은 몸으로만 하게 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음악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몸은 일을 하게 내버려 두어도 상관없지만 머리마저 일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음악을 들으며 계속해서 아래-제 사무실은 38층 짜리 건물 28층에 있습니다-를 내려다 봅니다. 그저 일요일 오후에 몇 시간 일할 뿐이고 돈도 받는 것인데, 단지 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이번 일요일은 달력에만 나타났다가 그냥 사라진 것입니다. 또 그에 맞춰 저도 음악의 힘을 빌어 저의 의식을 다른 곳으로 보냄으로써 회사에서 사라지려 했습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네 시, 모두가 자리를 뜬 다음 저도 일어났습니다. 원래의 계획은 쇼핑몰에 들러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사고 약간의 쇼핑을 하는 것이었는데, 쇼핑몰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려고 하니 차 열쇠가 차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아침에 난리를 쳐서 바꾼 렌트카였는데, 열쇠가 빠지지 않으니 차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혼자서 한참 난리를 치다가 결국 렌트카 회사에 전화를 걸어 사람을 부릅니다. 날은 추운데 차에서는 떠날 수 없으니 순식간에 차가 멍에가 된 셈입니다. 한 시간쯤을 주차장에서 허비하고 나서야 열쇠공이 도착했는데, 그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결국 새로 열쇠를 만들어 주고는 떠났습니다(코드만 있으면 열쇠를 만들 수 있는 모양입니다. 차에 모든 공구가 갖춰져 있구요). 하지만 이미 시간은 여섯시를 훌쩍 넘겨 저는 쇼핑몰을 지척에 두고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내일부터는 늦게까지 일해야 될 것 같아서 오늘 일부러 서두른 것이었는데, 모든게 헛수고였던 셈입니다. 짜증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고 삭힐 수 있는 방법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저 안으로 삼키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올 한 해,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에 사람과 얽히지 않은 이런 일들은 저에게 아무런 동요도 불러 일으키지 못합니다. 2005년은 모든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해였습니다. 한 때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나타났었지만 대부분 증발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림자라도 제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것도 위에 걸려있는 사진처럼 늘 오후 다섯시의 긴 형상을 하고서… 이 녀석은 앞으로도 저를 계속해서 쫓아다닐테지만 해가 없는 날에는 본의 아니게 쉬어야 하므로 늘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즐거운 기분은 차와 실갱이 하는 사이에 날아가 버렸고, 추위에 떨어 지친 몸을 이끌고 다니다 보니 몰려오는 피곤함이 그럭저럭 연결되어 있던 생각의 사슬을 조각내 버려 허탈한 일요일 저녁… 들으려던 씨디도 읽으려던 책도 뒷전으로 몰아 놓도록 했던 바쁜 주말은 저에게 동정의 눈길도 한 번 주지 않은채 지친 저의 등을 떠 밀어 월요일로 내몹니다. 아마 내일 아침에도 일찍 렌트카 회사에 가서 한바탕 싸우고 난 뒤 차를 다시 바꿔야 될 것 같습니다. 나이 한 살 더 먹어도 좋으니 더 나쁜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이 피곤한 2005년이 빨리 사라줘졌으면 하는 마음, 정말 간절합니다.
# by bluexmas | 2005/12/12 11:30 | Life | 트랙백 | 덧글(5)
블랙홀같은 올해도 이제 몇 날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버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