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
띠지 전면의 문구 ‘소설가 50인이 뽑은 2018년의 소설’, ‘제51회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는 아무런 설득력이 없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소설이 어떨 거라는 일말의 암시조차 주지 않은 채 찬사만 달아 놓은 띠지라니, 읽지도 않고서 ‘격이나 떨어트리고 있군’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사들고 지하철을 기다리며 몇 쪽 읽자마자 알아차렸다. 내가 맞았네. 이런 소설에 이런 띠지라니.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끊임 없이 책장을 넘겼다.
제목에 이끌리기를 잘했다. 누가 과연 ‘내게 무해한 사람’인가? 과연 내가 증오하는 그 무해함과 같은 결의 성정일까? 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와도 충돌하면 안되고 누구도 상처주면 안된다며 발버둥을 치는 사람들이 있다. 의식도 못하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며 몸부림을 친다. 그러나 결국은 이런 부류가 가장 유해한 사람이 된다. 그 무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무수한 무해하려는 노력 덕분에 타인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책장을 넘기며 어느 정도 이 무해함과 저 무해함에 닮은 구석이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각 편마다 ‘아니 상처주려는 의도가 아니었는데 왜 그러는 거야?’의 태도를 지닌 인물이 등장한다. 그 사람을 중심으로 상처 받는 관계가 돌아간다. 다만 저자는 그들에 대한 가치판단까지 내리려는 의도가 없어 보였다. 등장인물과 수나 화자가 조금씩 바뀌지만 구조는 거의 바뀌지 않고, 따라서 뒤로 갈 수록 재활용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특히 마지막 중편 ‘아치디에서’의 브라질인 화자는 정말 어색했다. (영어 교육과를 다녔다는 주인공이 ‘깁스’라는 단어를 과연 선택했을까?)
설사 그런 느낌을 받더라도 끝까지 책을 놓지 않게 만드는 힘이 있었으니, 문장이었다. 덤덤하고 평범한 단문이 죽 늘어서며 촘촘한 감정의 장을 형성한다. 그리고 장은 다시 덤덤하고 평범하게 읽히는 문장에 좀 더 다양한 빛과 색깔을 불어 넣는다. 업종은 다르지만 최대한 단문 위주로 글을 쓰려 하는 저자로서 한편 감동 받으면서도 한편 마음이 편했다. 이렇게 쓰는 사람이 있구나. 모든 소설에 걸쳐 시선을 돌리면서도 사실은 정확하게 정황과 감정을 묘사하는 문장이 가장 빛났다. 차마 줄은 칠 수 없어서 하나, 둘, 셋, 넷…전부 스물 네 점의 테이프 플랙을 붙여 놓았다. 그게 이 책을 향한 나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