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의 대왕 카스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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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지만 실속은 별로 없는 현대백화점 신도림점 식품층에 들렀다가 드디어 대왕 카스테라를 먹어 보았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사진의 카스테라 윗면을 보니 좀 의아했다. 저 정도 밖에 색이 나지 않았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먹어 보니 새로울 구석이 전혀 없는, 그야말로 카스테라인데 살짝 설익힘으로써 촉촉함 아닌 촉촉함을 구현하는 원리의 지극히 평범한 음식이었다. 대신 밀가루 냄새는 일정 수준 감수해야 한다. 한국에 맛없는 음식이 한둘이 아니니 사실 무감각해야 되는데, 나는 이 카스테라에 굉장히 좌절했다. 사실 참으로 쓸데 없는 에너지 낭비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목조목 뜯어볼 수록 무엇이 어디까지 망가졌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음식이라 생각 들었기 때문이다. 정리해보자.

1. 계란은 많은 일을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공기의 지탱이다. 설탕을 더해 거품기 등으로 공기를 불어 넣으면 부피가 커지면서 일정한 구조체를 형성한다. 그 구조체의 기포가 가열을 통해 그대로 굳어 완성된 음식-케이크 류-의 질감을 좌우한다. 자격증 시험에서 ‘공립법’이니 ‘별립법’로 통하는 용어가 공기를 불어 넣기 위한 계란의 전처리 방식을 의미한다. 흰자만으로 머랭을 올린 다음 반죽의 나머지 요소에 섞으면 별립법이고, 흰자와 노른자를 함께 섞어 공기를 불어 넣으면 공립법이다. 계란에 공기를 불어 넣어 부피를 확보하는 요리는 반드시 이 둘 가운데 하나의 단계를 거친다. 밀가루를 섞는 케이크(제누아즈와 비스퀴), 밀가루를 안 쓰는 무스류, 차거나 단 양쪽 맛 모두를 낼 수 있는 수플레 등이 대표적인 예다.

2. 예외는 있겠지만 카스테라는 기본적으로 레이어 케이크의 바탕인 둥근 제누아즈의 일족이다. 따라서 흰자와 노른자를 함께 섞어 올린다. 계란에 설탕을 더한 다음 끓을락말락하는 물중탕 위에 올려 조직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공기를 불어 넣는다. 색이 연해지며 부피가 커지는데, 3배에 이르면 부피를 확보한 것이다. 나는 대체로 일단 물중탕 위에 올려 어느 정도 온도와 부피를 확보한 다음, 스탠딩 믹서로 옮겨 거품기로 마저 올린다.

2-1. 따라서 기본적으로 계란+설탕+가열+거품기의 조합만으로 부피와 낮은 밀도를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지만, 일종의 보험 격으로 화학 팽창제 즉 베이킹파우더를 소량 섞는 건 문제가 아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 ‘첨가물’이라면 질색하는 이들 때문에 쓸데없는 오해가 발생한다. 매장에서 ‘무첨가물 건강식’으로 콘셉트를 잡아 홍보하던데, 카스테라 같은 빵류가 정확하게 건강식인지도 모르겠지만, 첨가제를 쓴다고 해서 딱히 더 음식의 질이 낮아진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믹서 몇 대만 들여 놓은, 백화점 식품 매장의 간단한 환경에서 과연 계란에 충분히 기포를 불어 넣고 유지하도록 굽는 과정을 신경써서 수행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팽창제나 조직 안정을 위한 유화제를 쓰는 게 문제가 되는가? 사실 계란 노른자는 레시틴 덕분에 훌륭한 자연 유화제 역할을 한다. 그럼 노른자 레시틴의 유화력을 빌면 문제가 없고 대두 등에서 추출한 레시틴을 첨가하면 문제인가? 내가 대왕 카스테라를 먹은 지난 주말 공교롭게도 ‘먹거리 엑스 파일’에서 이런 문제를 붙들고 늘어진 모양인데, 방향이 틀렸다.

3. 맛과 질감을 위해 지방을 더한다. 케이크의 경우라면 지방은 밀가루의 글루텐 조직을 일정 수준 잘라줘 케이크가 뻣뻣해지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맡는다. 버터의 맛이 훨씬 우월하므로 가장 좋은 지방이지만, 식용유를 쓴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식용유는 좀 더 중립적인 액체 지방이므로 경우에 따라 버터보다 나은 선택도 될 수 있다. 시폰 케이크가 좋은 예다. 이 또한 ‘먹거리 엑스 파일’에서 문제 삼은 모양인데 과연 한국에 버터에만 의존해서 빵을 구워 파는 업장이 몇 군데나 존재하는지 일단 그것부터 살펴봐야 할 것이다.

IMG_77564. 이렇게 부피를 확보한 기본 반죽에 구조를 고정시키기 위한 밀가루를 체로 내려 더한 뒤 오븐에 넣어 굽는다. 굽는 과정에서 틀이 반죽에 맞지 않을 경우 가운데가 지나치게 솟아 오를 가능성이 있으므로, 반죽의 부피에 맞는 크기의 틀을 고르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5.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케이크류는 그대로 먹어도 상관 없지만, 많은 경우 다른 맛의 매개체(vehicle) 역할을 한다. 아이싱이나 프로스팅 등을 바르고 덮어 형태와 맛, 질감을 한꺼번에 증진시킨다. 또한 고정된 기포로 인해 스폰지와 마찬가지인 조직을 가지므로 많은 양의 액체를 흡수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맛을 더하고 질감 또한 한층 더 부드러워진다. 일반적인 레이어 케이크나 카스테라의 시럽 (또는 꿀), 라틴 아메리카의 케이크 트레스 레체(Tres Leche) 케이크의 연유+크림의 조합이 다 같은 원리다.

6. 그런데 대왕 카스테라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덜 구워서 얻어냈다고 추정할 수 밖에 없는 물기가 좀 조직에 배어 있을 뿐, 그저 평범하디 평범한 대량 생산 계란빵의 맛이 났다.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 공장 카스테라도 아니고, 시장이나 좌판에서 파는 찐 옥수수빵과 느낌이 흡사했다. 그런데 엄청나게 유행을 타고, 싸다고 할 수 없는 가격(7,000원)에 팔린다.

7. 이런 음식을 먹고 가치 판단을 내릴 때 내가 가장 신경을 쓰는 요인은 일종의 의사결정이다. 특히 외국에서 들여온 음식이라면 ‘한국 입맛에 맞추었다’는 구실로 열악하게 구현해 비싸게 파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 카스테라도 그렇다고 보았다. 굳이 대만에서 파는 ‘원조(사진을 보면 일단 부피가 굉장히 큰 채로 오븐에서 꺼낸다. 하지만 곧 일정 수준 납작해지는데, 그 흔적이 색이 진하게 난 윗면에 주름의 형식으로 남는다)’를 참조하지 않더라도 꽤 많이 늘어날 수 있는 계란의 부피와 그로 인한 질감 등을 감안할 때 이렇게 납작하면서도 질감도 좋지 않은 걸 이런 가격에 팔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8. 그래서 대체 어떤 의사 결정으로 부피가 이 수준 밖에 안 되는 제품이 나왔을까? 1. 카스테라를 비롯한 계란 중심 빵류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알아도 각 매장의 생산자에게 전파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강 반죽 쳐서 대강 부어 굽는다. 2. 알고 전파하지만 생산자가 구현하지 못한다. 3. 알지만 어차피 먹는 이들이 모를 것이므로 생산자에게도 은폐하고 적당히 대충하도록 만든다.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의사결정 과정인데, 나는 국내에 열악하게 들어온 음식의 대부분이 3번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믿는다.

9. 그래서 좌절한다. 우리는 이런 걸 대체 왜 줄까지 서서 사먹어야 하는가. 물론 신문 보도에 나온 대로 다른 음식처럼 거품이 꺼져가고 있는데다가, 공차 매장 같은데서 오븐을 들여 놓고 만들어 팔 정도로 흔해졌으니 다행스럽게도 줄을 서 기다리는 수고는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느낀 좌절이 금방 사그러들지는 않는다.

30년을 훌쩍 넘기는 내 초등학교 시절에도 대량생산 카스테라는 존재했다. 어차피 일본에서 건너온 빵이니 한국에도 들어온지가 꽤 된 것이다. 제과점에서도 일찌감치 선물용 등으로 팔았다. 이젠 일본의 브랜드도 몇 들어왔다. 그래서 우리에게 엄청나게 익숙해야만 한다. 설사 이런 것이 유행을 타더라도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카스테라와 다르지 않고,  오히려 가격 등을 감안할 때 열악한 구석도 있음을 모를 수가 없다.

10. 그러나 사람들은 줄을 선다. 그리고 줄을 서는 수고를 감수하면서까지 먹는 음식은 점점 더 단순해지고 있다. 나는 츄로스가 그런 음식의 반열에 올랐을때 바닥을 쳤다고 생각했다. 에버랜드가 자연농원이던 시절에도 팔았다. 밀가루를 튀겨 설탕을 묻혔으니 맛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특별할 구석은 전혀 없다. 하지만 유행을 타면 서울 한복판에서 기다렸다가 사먹어야 한다.

11. 그래서 궁금해진다. 도대체 한국에서 음식이란 무엇인가. 대만 카스테라나 츄로스 따위는 저급 음식이니 박멸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대단치 않을 음식일지언정 오래 살아 남아 다양성의 확보에 기여하면 긍정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확률이 굉장히 높다. 지금껏 그렇게 사라져버린 음식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어제 이태원에서 벌집 아이스크림 매장을 지나쳐 갔는데, 과연 그게 전국 몇 군데 가운데 하나일지 궁금했다. 벌집 아이스크림을 기억은 하는가? 그렇다면 당시엔 왜 먹었는가?

하나의 음식이 도입되든 개발되든 소비자의 지평에 등장하고, 먹은 이들이 맛을 이해해 기호를 형성하는 과정을 통해 선택의 폭은 점점 더 넓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는 음식이 과연 얼마나 존재하는가. 전부 유행을 일시적으로 타서 확 부풀어 올랐다가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하나의 유행하는 음식에서 다른 유행하는 음식으로 자리와 위상을 갈아탈 뿐이다. 그리고 아마도 누군가의 자조적인 농담처럼, 최후에는 음식도 아닌 인형 뽑기 가게가 빈 자리를 차지할 지도 모른다.

12. 하여간 그래서 늘 궁금하지만 더 궁금해진다. 과연 한국에서 맛을 위해 음식을 선택하는 경우가 정녕 존재하는가? 뒤집어 말하자면 한국의 식문화에 취향(또는 입맛)이나 그걸 배양할 수 있는 환경이 존재하는가? 음식을 놓고 가치판단을 내렸을때 가장 많이 받는 피드백(또는 반론)은 ‘나는 맛있게 먹었다/내 입맛(취향)에는 맛있었다’다. 정말이지 양 팔뚝에 세로쓰기로 문신이라도 새기고 싶을 정도로 많이 들었다.

좋다. 하지만 동시에 궁금하다. 한 음식이 다른 음식에게 교체 당하고 빠르게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현실에서 과연 다양한 선택지를 놓고 시행착오를 겪어 가야만이 쌓을 수 있는 취향을 정말 배양할 수 있을까? 이 현존해온 카스테라의 기억을 압도적으로 지워버릴 정도로 맛있기 때문에 유행인가? 그럼 유행이 아닌 일종의 고전으로 자리잡을 수 있지 않을까? 정말?

6 Responses

  1. Real_Blue says:

    제가 몇 일전 친구한테 열변을 토했던 내용을 블루마스님의 글로 여기서 다시 읽는군요..

    잘 읽었습니다.~

  2. 냐녜 says:

    부모님이 사오셨을 때 이게 어떤 의미에서 대왕인지, 뭐가 특별하다고 대만에서 왔다고 자랑하는 건지, 7000원이나 하는 건지 등등 여러므로 마음이 복잡했던 기억이 나네요. 한편으로 부모임의 코멘트가 ‘이게 대왕 카스테라래’ 였던 점이 아쉬웠구요..

  3. Joung gibeom says:

    현대 판교에서 줄 서 있는거 보고 진심 궁금해서 먹어보니. 이걸 왜 줄서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마 프랑스 요리를 맛보려면 달팽이를 꼭 먹어봐야한다는 일부 말도 안되는 가이드북을 믿고 파리에서 찾아보기도 힘든 달팽이 찾아 다니는 현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4. JinMong says:

    좋은 공부가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일전에 다큐프로그램에서 한 요리사가 전국 그리고 더 나아가 전세계를 다니며 요리해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방송편은 제주도에 가서 지역 할머니들께 요리를 해주는 방송이었죠.
    바닷가에서 돌을 가져와 정성스럽게 닦고 각종 해초를 올려 이야기가 있는 요리를 만들고 있었지요.
    차분하고 분위기 있는 성우의 목소리와 잔잔한 음악으로 음식은 단순하지 않은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한껏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던 그 때 그 옆에서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 한 분이 한 말씀하십니다.
    “이거…배고픈 사람은 안되겠네요”
    그 요리사분도 웃고 저도 방송을 보며 한참을 웃었습니다.

    맛이란 그야말로 주관적일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가벼운입맛에 가벼운 맛이 다가왔고 가볍게 돌아갔다고해서 가벼운 입맛을 탓하거나 가벼운 맛 혹은 맛을 대하는 사람들의 가벼움을 탓할 수는 없을것 같다는 것이 제 개인소견입니다.
    어떤 분은 음식이 추억으로 삼켜지고 어떤 분은 분석하며 어떤 분은 정성과 깊이를 말씀하십니다.
    겨울철에 귀가하다 붕어빵 한 봉지 사들고 먹을땐 그 붕어빵은 그 짧은 시간동안 추억도 한조각있고 달달함도 한조각 있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제게 맛 이란 그 사람이 그 음식을 먹고 있는 동안 그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 음식과 맛의 가치가 정해진다고 생각됩니다.
    음식은 수 많은 유행속에서 살아남아 더 진화하며 깊이를 만들거나 혹은 추억을 대신하는 이름으로 남는 맛도 있을겁니다.어떤 형태로 다가오던 제겐 어렸을적부터 먹어왔던 카스테라인것 같습니다.
    위에 글 남기신 분의 부모님께서 사오신 카스테라는 단순히 유행만이 아닌 과거의 카스테라라는 부분도 있을것 같습니다. 카스테라라는 빵은 그 이름으로 이제 고전이 된게 아닐까도 생각됩니다.
    그래서 또 기다려봅니다.
    줄 서는 카스테라들이 또 생기고 없어지고를 반복하다 정점에 다다른 깊이 있는 카스테라가 나오기를 말입니다.
    하지만 제게 카스테라는 카스테라일 것 같습니다.
    글 쓰신 분의 내용을 보며 음식에 대해 좀 더 진지한 자세가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도 들어 도움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5. 랍기 says:

    이대앞에 따거 카스테라 드셔보세요~아 정확히는 카스테라말고 치즈케이크요! 블루마스님 후기가 궁금하네요~~